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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이불 위의 극장

by 바이너리

내가 말을 하고,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있게 된 건 아마 일곱 살쯤이었을 거다.

그 무렵 나는 어른들의 대화에 자주 끼어 있었다.

내 의지가 아니라, 엄마 아빠가 소리를 잘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 TV는 늘 소리가 꺼져 있거나, 최소한의 음량만 켜져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엄마 아빠에게 중요한 건 소리가 아니라 화면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 아빠의 작은 취미는 주말마다 케이블 채널에서 해주는 영화 보기였다.

헐리우드 영화가 대부분이었고, 아빠 취향이 담긴 성룡, 이연걸, 주성치 영화가 빠지지 않았다.


덕분에 나와 여동생은 자연스럽게 해외 영화를 접했다.

집 앞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테이프가 쌓였고, 주말 밤마다 우리는 좁은 방에 모여 이불을 덮고 영화를 봤다.

타이타닉, 라이언 일병 구하기, 피아니스트…


그 시간만큼은 우리가 가난하다는 사실이 세상에 없는 것 같았다.

그 열 평 남짓한 공간이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물론, 해외 영화였던 이유는 자막 덕분이었다.


아마 엄마 아빠도 그 시간들로 위로받고, 잠시나마 치유받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와 여동생은 그 시간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지금도 우리는 배우와 감독, 오래된 영화 이야기를 나눈다.


청각장애인 부모에게 물려받은 취향이 헐리우드 영화라니,

아이러니하면서도 찬란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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