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의 어딘가쯤, 나는 두 살 많은 오빠와 함께 베란다 타일 위에 서 있었다. 한낮의 햇빛에 공기는 조금 텁텁했지만 따뜻했고 오빠와 한 짝씩 나누어 밟고 올라선 슬리퍼 옆으로는 쭈그려 앉은 엄마의 앞치마 자락이 흔들렸다.
우리는 어깨너머로 엄마가 하는 일을 구경했다. 그녀는 두 뼘 정도 되는 깊이의 둥그런 화분에 작은 망을 깔고 흙을 꾹꾹 눌러 담은 다음, 검지 손가락으로 흙 가운데에 구멍을 내어 작은 씨를 넣고 다시 덮었다. 엄마는 물뿌리개로 물을 흠뻑 주며 나에게 말했다.
"이건 방울토마토, 저건 상추야. 토마토 잘 키우면 나중에 따서 먹을 수도 있다? 네가 한 번 키워 봐"
이게 방울토마토라고? 내가 알던 방울토마토는 이렇게 생긴 게 아니었는데. 빨갛고 동그랗고 단단한 토마토가 원래 이렇게 눈에 힘을 주고 보아야만 보이는 작은 씨앗이었다니. 반신반의하긴 했지만 나는 일단 시간이 지나면 진짜 토마토가 된다는 엄마의 말을 믿어 주기로 했다.
무언가를 키운다는 것이 처음이어서 나는 꽤 지극정성이었던 것 같다. 깜빡한 날도 있었지만 흙이 마르지 않게 물을 주고, 골고루 해를 볼 수 있게 화분을 돌려주거나 옆 화분에 꽂힌 영양 주사를 몰래 가져다 꽂고 가끔은, 아무도 모르게 노래도 불러 주고 그랬다. <이웃집 토토로>가 그즈음 나왔던가. 그랬다면 나는 분명 새벽에 몰래 베란다로 나가 화분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싹이 트는 춤을 추었을 거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첫 토마토는 생각했던 것보다 우람하게 자라났다. 줄기가 굵어지고 잎이 많아지더니 이내곧 노랗고 작은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고 꽃송이마다 알알이 파란 토마토를 품어 빨갛게 익혔다.
여름의 한복판에서, 마침내 토마토를 수확해 입에 넣어 터뜨렸다. 그리고 토마토의 모습에 대해 생각했다. 토마토는 원래 어떻게 생겼던 걸까. 토마토는, 사실 단단한 밑동이었고 조금 정신없이 생긴 이파리들이었고 작고 노란 꽃이었고 연둣빛 꽃받침이었고 파란 알갱이였다. 토마토의 제일 처음은, 콩알보다도 작고 작은 씨앗이었다. 그것들은 전부 다 토마토였다.
씨앗 토마토가 빨갛고 동그란 토마토가 되기 위해 어떤 지난한 시간을 거쳤는지 안다고 해서 토마토가 더 맛있어졌다든지 한 것은 아니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젠 맛없는 토마토를 먹을 때면 작은 응원 정도는 보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 덜 영근 토마토 꼭지에서 나는 풋풋하고 단단한 맛에 어떻게든 위로 더 위로 힘차게 자라던 줄기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상경해서 자취를 시작하고 방 안에 드는 빛 한 줌이 아쉬운 날들을 꽤 오래 보냈다. 이따금 장을 보러 가면 마트에 진열된 고추나 오이, 딸기 같은 것들을 바라보며 이들이 원래 뿌리내렸던 땅과 누군가의 손길, 햇빛과 비를 생각한다. 한 가지의 정성이라도 부족했다면 튼튼하게 자라지 못했을 텐데, 무사히 여기까지 왔다. 기특하고 고맙게, 맛있게 먹어야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