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그어진 문장

우리는 같은 꿈을 꾸지 않는다.

by 바인

그는 언제나 조용히 책을 읽었다.
작업실 소파, 카페 구석, 때론 갤러리 한편.
책을 펼치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에 들린 책 제목이 늘 궁금했지만,
끝내 묻지 않았다.
괜히 선을 넘을까 봐,
그 적당한 거리를 깨트릴까 봐.

어느 날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는 닳아 있었고 귀퉁이는 조금 접혀 있었다.
페이지 여기저기엔 연필로 그은 밑줄들.
그리고 작은 글씨로 적힌 메모들.

나는 그중 하나에 시선이 멈췄다.
‘가까워질수록 조심스러워지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장.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과, 말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마음이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책장을 덮었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날 밤, 나는 혼자 웃고, 혼자 울었다.
그 문장들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하게 가슴이 저렸다.

그 이후로 그는 자주 책을 펼쳐놓고 자리를 비우곤 했다.
나는 모른 척하면서도 결국 또 책을 넘겼다.

그의 필체는 언제나 조용했고,
밑줄은 점점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네가 웃는 순간을 기억하는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마.’
‘이 문장을 너도 좋아할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건, 그만큼 오래 봤다는 뜻이야.’

그러던 어느 날은, 책 사이에 작은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종이에는 딱 한 줄만 연필로 적혀 있었다.
‘오늘, 너도 책 속에 너의 마음을 한 줄 남겨줘.’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의 필체와는 다르게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었다.

‘나는... 너의 밑줄을 읽는 게 좋아.’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쪽지를 조용히 책갈피 삼아 끼웠다.

그는 여전히 책을 읽었고,
나는 그의 맞은편에서 그림을 그렸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붓끝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

두 가지 조용한 리듬이
하나의 방 안에서
서로의 마음을 아주 천천히,
아주 조용히 닿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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