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분상식| 후세인-맥마흔 선언? 누가 그래요.

by 정환빈

같은 주제로 쓴 오마이뉴스 기고글(중동판 환단고기 4편)로 대체합니다.


기실, 대부분의 학자는 고작 20여 쪽짜리 원문조차 읽어보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는 영국의 약속이 '각서'나 '선언' 따위로 잘못 번역되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후세인과 맥마흔은 전시에 10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독립의 경계와 영국의 경제적 이권 등 여러 사항을 비밀리에 협상했다. 영국은 이를 "Correspondence"로 명명했다. Correspondence는 서신이나 전보, 이메일 등 상호 간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의사소통하는 방식을 폭넓게 의미한다. 이 경우에는 사건의 성격이나 의미, 목적 등을 고려해 단순히 협상으로 의역해도 무방하며, 보다 정확히는 '서신협상'으로 부르면 된다.


영국 문서.png


그런데 우리말에는 correspondence에 대응하는 단어가 없다 보니 가지각색의 번역이 난무한다.

가장 널리 사용되는 번역은 선언이다. 외교부는 각서를 채택했다. 그러나 각각의 서신은 8개월간 이어진 협상의 과정이었고, 그 어떤 서신도 각서나 선언문으로 작성되지 않았다.


특히 선언은 형식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적 함의에서도 잘못되었다. 영국이 일방적으로 아랍의 독립을 인정하겠다고 선언한 뒤 철회하는 경우와, 반란의 대가로 독립을 인정하겠다고 협상한 뒤 이를 어긴 것은 정치적 책임의 성격과 무게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데도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선언으로 잘못 등재되어 있다.


나무위키에서 넘어오신 분들은 아래 글(제가 브런치에 쓴 관련 주제 글)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문제 관련해서 2년 전에 브런치에 글을 썼고, 나무위키에 인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전쯤에 나무위키를 가 보니까 영국이 독립을 약속한 서신(=맥마흔의 두 번째 서신)에 대해서는 '선언'으로 볼 수 있지 않냐는 해석이 있더군요. 네, 절대 안 됩니다. 학자들이 그렇게 안 쓰는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후세인-맥마흔 서신협상은 어떤 문서도 단독으로 읽히지 않습니다. 10건의 문서가 하나의 협상 과정을 나타내는 세트입니다. 맥마흔의 두 번째 서신을 해석하는 데는 그 이후에 주고받은 서신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독립을 인정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후 서신에서 양측이 "북서쪽"만을 논의하는 것을 중요한 근거 중 하나로 내세웁니다. 반대로 독립 약속의 실효성을 문제 삼는 측에서는 이후 서신에 등장하는 아랍의 적극적인 참전 요구, 즉, 상호책무성을 부각합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전시에 비밀리에 자기네끼리 협상한 걸 가지고 선언이라고 쓰는 경우는 없습니다. 영어로는 영국의 약속을 '부정확하긴 해도' 서술적 표현(동사)으로 declare를 쓸 수는 있습니다. Great Britain declared Arab Independence.


그런데 이걸 명사 Declaration으로 쓰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명사로 쓰려면, 선언문이나 선언적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문서나 행위는 대부분 공개적이며, 비밀리에 행해지더라도 그에 준하는 양식이 있어야 합니다. 후세인과 맥마흔은 서신을 주고받으며 조건을 논의한 것이라 선언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만약 맥마흔이 두 번째 서신을 보낸 시점에서 협상이 종료되었다면, 그 경우에는 선언이라는 표현을 다소 부정확하게라도 쓸 수는 있습니다.


저는 보통 검색을 영어로 해서 나무위키는 잘 모르는데, 이번에 보고 좀 놀랐던 게 2년 전에는 너무 부실하고 틀린 것도 많길래 아쉽다고 브런치 글에 적었었는데, 이제는 원문도 다 번역해서 올리고 엄청 상세해졌더군요. 시간이 없어서 읽지는 못했지만, 많이 개선되었으리라 믿습니다. (대체 누가 이런 작업을 하시는건지 진짜 궁금하네요)


한 가지만 조언드리자면, 해외 학자들이 쓴 글이라 해서 무조건 받아 쓰시면 안 됩니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년 전에는 '조약이 아니니까 영국이 지킬 의무가 없다'라는 주장이 있더군요. 출처는 번역서였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리인지 쉽게 눈치챌 수 있어야 합니다. 전시에 반란을 대가로 독립을 약속한 건데, 그게 지킬 의무가 없다? 영국은 단 한 번도 그런 소리를 한 적도 없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누가 영국 정부랑 협상을 하겠습니까. 게다가 영국은 당사자도 아닌 프랑스도 이걸 지켜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기까지 했죠.


제가 연구하면서 늘 느끼는 건 국내나 해외 학자나 가릴 것 없이 다 부족한 점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늘 조심조심하려고 신경을 많이 쓰고 있고요. 그러니 어떤 글을 읽더라도 항상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숙고해 가면서! 비판적으로! 읽는 습관을 들이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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