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에서의 전쟁이 어느덧 넉 달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가자지구 봉쇄 이후 그간 주기적으로 반복된 이스라엘의 침공이 짧으면 일주일, 길면 한 달이었으나 이번에는 유례없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국민들의 관심도 사그라들었습니다. 어차피 잘 알지도 못하는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 뭐 어쩌겠냐는 심정이실 겁니다.
반면 서구권에서는 여전히 팔레스타인 문제가 화두고, 두 가지 목소리가 분출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벌이고 있는 잔학행위를 멈추라는 '인도주의적 접근법'과 팔레스타인인들의 완전한 테러 종식을 목표로 하마스를 섬멸해야 한다는 '안보적 접근법'이지요.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들리는 목소리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직접 살아보고, 또 이들의 역사를 연구한 '한국인'으로서는 제3의 접근법을 제안합니다. 바로 '반식민주의적 접근법'입니다.
이스라엘의 식민주의, 이대로 괜찮나?
오늘날 팔레스타인인들과 하마스의 투쟁 상대는 이스라엘의 식민주의입니다. 1880년경, 50만 아랍인과 2만 유대인이 사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 국가를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이 침략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의도가 없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뒤에서는 토착민을 추방하는 음모를 꾸몄지요.
아랍인들은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영국 등의 유럽 국가들의 탄압으로 실패로 끝나고 팔레스타인 땅의 78%에서 이스라엘이 건국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1967년에 나머지 22% 땅마저 정복합니다. 이후 반 세기가 넘도록 팔레스타인인들은 땅과 물을 빼앗기고, 인권과 자유를 잃고 식민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 팔레스타인에서 재현되다
식민 지배가 시작되고 불과 21년 만인 1988년까지 서안지구 토지의 55%와 가자지구의 30%가 유대인 손에 넘어갔습니다. 수자원도 서안지구의 78%와 가자지구의 3분의 1이 약탈당했고요. 항거하는 주민들은 모조리 감옥으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습니다. 식민지 팔레스타인에서는 팔레스타인 국기의 색깔이 들어간 옷을 입거나 독립을 노래하는 시집을 가지고 있기만 해도 체포당했습니다.
이스라엘 인권단체 베첼렘(B’Tselem)은 1988-1990년 동안 고문 실태를 조사했습니다. 수용소마다 고문과 학대 방식은 다양했지만 "전형적인 사례"로 팔레스타인인 청년 와일의 경험담을 소개했습니다.
헤브론에 사는 20세 청년 와일은 1989년 5월 22일 새벽 2시에 체포되었다. 다음날 그는 다하리야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24일에는 심문 없이 온종일 수납장에 묶인 채 서 있었고, 밤 10시에는 가로세로 90센티미터의 옷장에 3시간 동안 갇혔다. 이후 작은 독방으로 이송돼 3일 동안 감금되었다.
28일에는 다시 옷장에 7시간 동안 갇혀 있었고, 그 후 독방으로 돌아왔다. 일주일이 지난 29일에야 비로소 심문이 시작되었다. 심문관은 5시간에 걸쳐 자백하라고 협박한 뒤 구타했다. 와일은 기절했다. 나중에 정신이 들었을 때는 다시 옷장에 갇혀 있었다. 심문은 저녁에 재개되었고, 두 손이 묶인 채 바닥에 눕혀졌다. 그 뒤 손과 발로 고환을 구타당하고, 일분 가까이 목이 졸리는 걸 두 차례 반복했고, 고무로 감싼 금속 막대로 머리를 맞았다. 이어서 의자 받침에 등이 묶인 채 머리와 다리가 양 바닥에 닿게 하는 바나나 자세를 취하게 한 상태에서 복부를 가격 당했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다시 작은 방으로 끌려왔다. 이후로도 와일은 비슷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고문받았다. 고문 외에도 그녀의 누이를 강간할 것이라거나 신베트 요원이 그녀의 어머니를 임신시켰다는 등 협박과 굴욕을 당했다. 구금된 지 22일 만에야 변호사를 만날 수 있었고, 36일째에 처음으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게 허락되었다.
45일째 되는 날에 그는 돌을 던졌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고 5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정환빈,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707)
1998년에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는 “이스라엘은 지구상에서 고문과 학대가 법으로 허용된 유일한 나라”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듬해부터 이스라엘은 물리적 고통을 주는 것은 법으로 금지하되 정신적 고문에 집중합니다.
여전히 식민 지배와 씨름하는 팔레스타인
1994년에 지금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시작되고 2012년에 유엔은 팔레스타인의 국가 지위를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이 넘은 지금도 팔레스타인 땅의 절반은 이스라엘이 직접 통치하고 있습니다. 이 절반의 땅은 사해를 포함해 각종 천연자원이 넘치고 비옥한 땅들입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정부에 넘겨준 나머지 절반은 '주거지구'입니다. 그러니 국가 경제가 제대로 운영될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주민들은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팔레스타인 중앙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의 1인당 GDP는 USD 3,800입니다. 우리나라의 거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거지요. 그래서 다들 일자리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투잡도 매우 흔하고요.
제가 인상 깊었던 모습은 새벽에도 일하는 택시기사들이었습니다. 한국과 달리 팔레스타인에서는 음주문화가 없어 밤이나 새벽에 길거리 손님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밤늦게, 혹은 심지어 새벽 1-2시경에 퇴근해도 건물 앞에는 택시 기사들이 있었습니다. 저희 사무실이나 그 외 층에서 켜진 빛을 보고 몇 시간이나 진을 치고 무작정 기다리고 있던 거지요. 그렇게 저를 태워서 10분 간 달리고 나서 버는 금액은 우리나라 돈으로 4천 원. 현지 물가로 샤와르마(고기가 들어간 빵) 1-2개 가격입니다.
식민주의가 계속되는 이유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는 지식인과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대단히 널리 비판받고 있습니다. 식민주의를 반성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열심히 비판하는 일본조차도 이스라엘의 식민지배에 반대합니다. 일본은 팔레스타인 원조에도 적극적입니다. 2006년부터 2021년까지 일본의 원조는 우리보다 13배나 많았고, 2021년에는33.6배나 차이가 납니다.
인터넷에 보면 이스라엘이 '동해'로 표기하는 몇 안 되는 국가라서 이스라엘을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건 이스라엘이 우리나라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자국을 비판하는 일본을 미워해서 그런 겁니다만 어쨌든, 우리한테 중요한 것이 '동해'로 표기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 선조들에게 악몽을 안겨 준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것인가요?
전쟁이 끝나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팔레스타인을 잊을 겁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말이지요. 그리고 또다시 수년 뒤, 혹은 수십 년 뒤 팔레스타인인들이 저항하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아니, 쟤들은 왜 자꾸 저런데? 그냥 평화롭게 살면 될 텐데?"
여러분. 일본인들이 어째서 과거의 식민 지배를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무관심하거나 혹은 심지어 적반하장으로 나오는지 궁금하시면 거울을 보면 됩니다. 일본인이나 한국인의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내게 피해가 오지 않는 일에 관심을 주지 않는 거지요.
일제 식민주의의 고통을 받으며 항거한 우리 선조들의 삶을 알고 싶다면, 유물만 있는 박물관보다 팔레스타인에 직접 와서 보십시오. 주민들이 식민 지배로 고통을 받아도, 자유와 인권을 되찾으려고 투쟁하면 테러리스트로 비난받는, 백 년 전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두눈으로 생생히 보실 수 있습니다.
다가올 2024년 새해에는 우리 한국인들이 일본 타령이 아니라 정말로 식민주의를 비판할 줄 아는 참된 반식민주의 의식을 갖추기를 소망합니다. 모두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