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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un 18. 2021

장소는 죄가 없어요


  재미 삼아 본 타로에서 남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연하게 내가 사는 곳은 한국에서 제일 남쪽에 위치한 섬이었으므로 나는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 사람이 내 귀인이려나?' 궁금해하며 가장 밝은 모습으로 그들을 웃겼다. 덕분에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는데, 남쪽에 귀인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모든 이가 귀인일지 모른다는 상상에 스스로의 태도를 점검해서가 아닐까.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옳았다. 내가 그들에게 진심을 베풀수록 그들도 마음을 가득 담은 애정을 표했다.


  자연스레 점차 발 딛고 서 있는 곳에 소속감이 들었다. 물론 쓸데없는 명함을 만들어서…… 세상에 나를 내보이는 폭신한 종이가 있다는 든든함에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심지어 어제는 그토록 싫어하던 제주에 조금 더 오래 살 수도 있겠다는 이유 모를 마음이 들었다. 엄마와 아빠는 늘 그렇듯 종일 싸우고 남동생의 사춘기는 갈수록 극심해지지만, 원가족에 내 기분을 모두 맡기지 말자는 방관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대하니 예전처럼 좌절하는 일은 덜해진 덕분이다.


  우리는 장소와 추억을 결합해 기억한다. 온돌을 무지막지로 때도 외풍이 일던 옥탑방에서의 기억으로 성북구라는 단어만 들어도 으스스해지듯, 인품이 훌륭하지 않은 상사를 만나 잔뜩 데인 회사가 을지로에 위치한 탓에 중구라는 얘기만 들어도 마음이 아리듯이.


  내게는 고향이 그랬다. 귀에 실리콘을 욱여넣고 공부만 하던 나는 제주만 탈출하면 무엇이든 다 이루어지리라 여겼고, 제주의 싫은 점을 손꼽자 언젠가부터 제주의 부정적인 면만 눈에 들어왔다. 덕분에 책을 쓸 만큼의 재료는 얻었지만 현실 세계에서의 나는 초라했다. 어느 곳이든 내 집처럼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서울에서 인턴 기자로 활동할 때는 '서울이 싫어 나가고 싶다'는 이십 대의 이야기를 담아 주목을 받았다. 정작 제주에서는 제주가 싫다고 했으니 내게는 한국이 맞지 않나라는 마음이 들었고, 돈을 모아 떠난 유럽에서는 온갖 사건으로 호되게 당하며 한국이 그리워 향수병에 시름시름 앓았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며 영영 마음을 붙이고 살 수 있는 지역이 없는 건가 싶어 좌절했다. 지금도 "서울은 언제 다시 올 거야?"라는 친구들의 말에 "글쎄, 대구도 살고 부산도 살고 광주도 살아보려고."라고 답하는 건 아직까지 나와 딱 맞는 지역을 찾지 못해서 일지 모르겠다.


  앞으로 이사는 어디를 가야 할까, 고민하던 와중에 비슷한 분을 만났다. 그분은 나와 닮게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분이었는데, 학교를 다니거나 강제로 떠난 현장 체험 학습을 제외하고는 제주의 자연이라거나 먹거리를 마음껏 누릴 여유가 없었으므로 어른이 되어 이곳을 보니 다르게 느껴진다고 했다. "장소는 죄가 없으니까요."라 무심코 말하던 그의 얘기에서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래, 장소는 죄가 없는 거였다. 각 지역에서 겪은 상황을 바탕으로 장소를 내 멋대로 해석해서일 뿐. 한때 소매치기를 당하고 열악한 숙소에 머물며 유적지에서 된통 당한 로마가 언젠가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도시로 탈바꿈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는 이탈리아에 발끝 하나 닿지 않겠다고 장담했지만 코로나가 끝나면 가장 먼저 이탈리아로 날아가 보려 한다. 금전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더 큰 여유를 챙기고 나서.


  과거에 묶이면 현재가 고통스러워진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 싫어했던 장소가 좋아지는 상황에 모순을 느꼈다. 함부로 내가 이곳을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나? 이곳은 내게 끔찍한 사건을 선사하던 곳인데. 내가 태어날 적부터 지금까지 자라온 애월의 집이 그렇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물건으로 맞았고 신발을 채 신지 못하고 도망가 발에 유리가 찍혀 피를 닦으며 울었다. 맞을 때마다 도피하던 숲은 다름 아닌 이 근처다. 어른이 된 나는 이제 새로 산 하얀 운동화로 그곳을 느리게 거닌다.


  미워해야 하지 않을까, 이 저수지와 수풀을. 증오해야 하지 않을까, 이 집과 제주를. 그러나 "장소는 죄가 없다"는 친구의 말을 오래 곱씹으면 다홍빛으로 저무는 노을과 다양한 구름이 뻗어 나가는 새벽녘의 하늘이 보인다. 장소는 잘못한 게 없으니 더는 장소를 미워하지 말아야겠다. 제주에서 책 제목을 언급할 때마다 민망해 웃고 넘겼는데, "지금은 싫지 않아요."라고 또박또박 말할 날이 머지않은 미래에 올 것만 같다. 이제 나는 귀인을 무작정 기다리지 않고 자신을 귀인으로 만들 능력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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