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도 감정도 선명하지 않았던 날들
화려한 빌딩과 줄 서서 먹는 맛집, 디자이너 브랜드 매장들이 즐비해 있고, 다양한 뷰티 브랜드의 팝업 스토어가 열리는 곳. 신분당선 개통 이후, 신사 가로수길은 서울의 교통 요충지가 되어버렸다. 대학 졸업 후 서울 전역으로 흩어진 친구들을 만나기에도 적당한 장소였다.
북적이는 대로변을 피해 골목을 조금 살피다 보면 아기자기한 술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맥주나 칵테일 한두 잔으로 마무리하는 친구들과 달리, 나와 주량과 취향이 딱 맞는 고교 동창을 만나 통골뱅이탕에 소주로 시작했다. 그리고 2차를 찾다가 우연히 한 바를 발견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수, 따뜻한 우드톤 인테리어, 공중에 살짝 떠 있는 달 조명이 매력적이었다.
술병과 리큐르가 벽처럼 진열된 바테이블에 앉아 칵테일을 눈으로 즐겼다. 달달한 술 대신 도수 높은 술을 골라 마시며 야구 이야기를 나누는 여자 둘이 신기했는지, 사장님이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유쾌한 그의 말투 덕에 시간은 금세 새벽으로 흘렀다. 그날 대화의 끝은 친구의 실연이었고, 이내 친구는 평소보다 이르게 취했다. 친구를 태운 택시가 떠난 후, 그와 둘만의 대화가 이어졌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후반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장면은 그와 나란히 술잔을 들고 있던 모습. 통골뱅이탕과 소주로 시작한 그날의 술은 칵테일을 거쳐 위스키로 끝났고, 눈을 떠보니 택시 영수증도 없이 나는 내 침대 위에 있었다.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무렵,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문자가 왔다. “속은 괜찮아요?” 그 한 문장에 단번에 그임을 알 수 있었다. 손님으로 만나 몇 시간 대화한 사이였지만, 우리는 이미 꽤 가까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대화는 곧 저녁 약속으로 이어졌다.
며칠 뒤, 평일 저녁 퇴근길에 그를 만났다. 개인화로에 구워주는 양고기를 먹으며 우린 또 다른 대화를 나눴고, 2차는 밝은 분위기의 술집으로 옮겼다. 처음 보는 토마토 안주에 오이가 든 술, 새로운 조합에 신기해하는 내 옆에서 그는 익숙하게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단골집에 내가 초대된 것이다. 고작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나는 이미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손님이 사생활이 된 적은 없었다던 그는, 나를 보던 첫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그는 내게 부담이었을까.
그 뒤로 몇 번 더 그의 바를 찾았다. 정기 휴무 없이 가게를 책임져야 하는 그는 항상 바빴고, 나는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이었다. 오래 이어지기엔 서로의 시간이 너무 달랐다. 바빠진 일상 속에서 그의 시간을 지나쳤고, 답장을 못하는 날이 늘어났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연락은 끊겼다. 가끔 가로수길을 지날 때면 문득 그가 떠오르는 정도.
그와의 기억이 흐릿해질 무렵,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어느 저녁이었다.
낮엔 조금 더웠다가도, 저녁엔 선선한 바람이 불던 그런 계절. 일기장과 펜을 들고 집 앞을 산책하던 중, 테라스가 넓은 펍을 발견했다. 데이트 명소 바로 앞에 위치한 탓에, 평범한 평일 저녁엔 한산했고, 덕분에 나는 혼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생맥주 두세 잔을 마시며 일기를 썼고, 날이 저물수록 바람은 기분 좋게 차가웠다. 벚꽃이나 단풍이 흩날리는 특별한 날만 아니면, 내 자리가 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계산을 하며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커피도 팔고, 메뉴에 없는 칵테일도 만들어주겠다던 그는 자주 오라는 말을 남겼고, 나도 모르게 그곳의 단골이 될 것 같은 예감에 들떴다. 며칠 뒤 다시 찾았을 때, 그는 너무도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가 아닌 "보고 싶었어요"라는 인사가 조금 낯설면서도 특별했다.
나의 자리는 테라스 가장 구석이었고, 가게 뒤로 돌아 흡연하러 나가던 그는 매번 나와 마주쳤다. 책을 읽다가 눈이 마주쳤고, 다섯 번째쯤엔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남자친구가 있냐는 질문에 “없다”는 대답을 하자, “너무 좋다”며 웃었다. 이내 번호를 물었고, 우리는 테라스의 나와 계산대의 그로서 문자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그는 영업을 마치고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와는 다른 장소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 회사까지 운영하느라 늘 시간이 없던 그는, 영업이 끝나면 나를 데려다주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가끔 그곳을 찾았고, 칵테일과 생맥주 몇 잔을 곁들였다. 그렇게 어느 날, 나의 발길이 자연스레 뜸해지면서 나의 단골집도 사라졌다.
가끔 생각한다. 영화 속 주인공이었다면, 우리의 만남은 달라졌을까. 도저히 틈이 없던 일상 속에서 내 공간에 들어온 낯선 사람. 그 짧은 순간에 느낀 감정이 정말 특별했던 걸까. 이상하리만치 닮아있던 두 사람은 동갑이었고, 같은 업종, 같은 나이, 같은 생활 패턴 속에서 이끌렸던 우리는 서로의 거울 같았다.
나는 종종, 그들이 바라본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한다. 내가 짓던 표정, 건넸던 말투, 그리고 내가 보였던 모습들. 그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았을까.
사람 사이의 감정은 늘 이름 붙이기 어렵다. 관계란, 단순히 연결된 시간보다 그 속에 담긴 진심과 감정의 무게로 남는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눈을 통해 나를 바라보게 된다. 누군가를 좋아했던 그 마음, 말 한마디에 기분이 오르내렸던 그 순간들, 돌아오는 밤길에 느꼈던 쓸쓸함까지. 모든 감정이 지나가고 나면, 결국 나만이 남는다. 그 기억이 나를 만든다.
사랑은 때로 짧고, 관계는 흐릿해지지만,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선명하게 알게 된다. 나를 더 잘 알게 된다는 건, 그 자체로 꽤 괜찮은 사랑의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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