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취향은 나의 사랑이 되었다

끝이 나야 알게 되는 사랑

by Roselle

남들처럼 입시를 준비하지 않았던 나는,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가지 못했고 대학생활에 도무지 적응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설득 반 강요 반으로 억지로 한 학기를 채운 뒤, 자퇴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휴학을 선택했다. 그리고 풀타임으로 구한 알바는 양재천 카페거리의 작은 브런치 카페였다.


샐러드와 샌드위치, 간단한 파스타와 작은 피자, 이탈리안 맥주와 직접 내리는 더치커피까지. 모든 것이 새롭지만 매력적이었던 스물한 살, 매일 아침 커피를 내리고 쇼케이스에 가락시장에서 온 신선한 과일을 채워 넣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정 많고 신앙심 깊은 사장님 부부는 나를 딸처럼 챙겨주셨고, 그렇게 나는 그곳에서 청춘의 한 페이지를 보내게 되었다.


더치커피 내리는 법이 손에 익을 때쯤, 주말 알바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대학원생이라는 그는 키가 크고 단정했고, 금빛이 섞인 안경을 쓴 채 흰 앞치마와 체육복 같은 옷을 맞춰 입고 왔다. 첫인상은 범생이 같았고, 특별한 인상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느 날, 바빠서 연장 근무를 하게 된 저녁, 처음으로 그와 대화를 나눴다. 대전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닌다는 이야기. 컴퓨터공학 전공이라더니, 말투며 분위기까지 딱 너드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엔 삼촌 같기도 하고, 묘하게 거리감이 있었던 그.


그러다 한 2주 지났을까, 퇴근하는 내게 연락처를 알려달라더니 이내 연락이 왔다. 주말에 뭐 하냐는 물음에 별일 없다며 살짝 설레었을 때, '알바 대타'를 해달라는 부탁이 왔다. 그럼 그렇지. 시간은 나고 시급은 벌 수 있으니 수락했고, 그 주말은 아침부터 밤까지 혹독한 노동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내게 고맙다며 맥주 한 잔을 사겠다고 했다. 어린 학생들과는 다르게 고마움엔 성의를 표하는 그의 방식이 맘에 들었다. 그렇게 노동주로 생맥주를 들이키며, 그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지금보다 10년 전이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상은 조금 달랐다. 그는 20대 후반이지만 취업도 결혼도 못한 학생이었고, 친구들은 슬슬 결혼하는 때였다. 집안의 장남이었던 탓에 결혼을 준비하다 전여자 친구와 헤어졌고, 이런저런 관계에 지친 터라 연애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나도 비슷했다. 대학을 가기 전 마음을 크게 다친 탓에 이런저런 연고를 찾다 보니 별의별 놈들을 만났던 때. 법은 성인이라고 하는데 사회는 무섭고, 학생이라고 핑계 대고 싶은데 학교는 싫었던 때라 그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대화는 점차 개인사로 흘러갔고, 거의 첫 만남이었던 그 시간은 이상하리만큼 편안했다. 가벼운 노동주가 새벽까지 흘렀고, 그날 우리는 아침을 함께 맞았다.


연애할 생각이 없다던 그는 놀랄 만큼 내게 확신이 있는 듯했다. 진중해 보이는 성격과는 달리 직진이었고, 나이차가 생소했던 나는 망설였다. 어느 아파트 공원에서 "나이 많은 오빠 믿고 만나보자"라고 했을 때,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와의 연애는 전시회 같았다. 매일 잘 차려진 옷을 입었고, 매번 새로운 취향을 익혔고, 준비된 듯한 풍경들 속에서 우리는 걸었다. 세계맥주를 배우고, 와인을 곁들일 안주를 익혔다. 있는 줄도 몰랐던 독립영화를 보거나 유니크한 패션 브랜드를 알아갔다. 에세이를 좋아했던 그는 교보문고 핫트랙스에서 파는 신용카드 사이즈의 작은 엽서에 편지를 써주곤 했다. 식당엘 가면 항상 식당 명함을 모으고, 가끔 서툴지만 디저트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가 가게 컴퓨터에 깔아준 뉴에이지와 인디뮤직 사이의 플레이리스트는, 아직도 나를 달랜다.


그가 좋아했던 것들이 어느새 내 생활에 녹아들었고, 내 취향이 되어갔다. 그는 늘 무언가를 소개했고, 나는 그것에 익숙해졌다.

그가 떠난 날, 내 방엔 그가 남긴 것들만 남아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며 선물했던 노란 커버의 에세이는 그가 떠난 후에야 비소로 펼쳤고, 한 장 한 장의 글은 그와 나 자체였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그의 세계에 얼마나 깊이 물들어 있었는지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 사랑이었다는 것도.


그가 떠난 뒤, 한동안은 아무것도 손에 닿지 않았다. 밥이 넘어가질 않아서 술만 마셨고, 잠을 자지 못해서 온종일 커피를 부어댔다.

사랑은 끝났지만, 그 시간을 지운 적은 없다.

그의 취향에 물들었던 그 시절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이 아닌지 더욱 분명히 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고른 플레이리스트와 에세이에는 그의 취향이 묻어있고, 그건 여전히 내 안에 남은 '취향'이 되었다.


관계란 그런 것 같다. 때로는 타인의 세계에 스며들며 나를 잃는 듯 보일지라도, 결국 나를 돌아오는 방식으로 성장하게 한다.

그 사랑이 끝나고도 남은 것은 아픔이 아니라, 그를 거쳐 간 내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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