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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감성 Oct 24. 2021

퇴사

9장

1. 퇴사에 대한 고민

2달 정도 가벼운 일을 하면서 회사를 다닐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을 때, 회사를 더 다니는 게 맞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을 계속했다. 이때는 하루마다 생각이 바뀌는 날이 많았다. 선택의 장단점이 명확하니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현재를 택하면 미래가 불안하고, 미래를 택하면 현재가 불안했다.


(1) 현실적인 문제들


-경력의 애매함

처음 입사했을 때 내 최우선 목표는 이쪽 경력을 더 많이 쌓아서 모바일 개발 -> PC 소프트웨어 개발로 직종을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력이 최소 3년은 필요했는데, 1년 반밖에 채우지 못 한 연차가 아쉬웠다. 개발자로서 계속 회사를 다니려면 애매한 경력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었다. 이전에 채운 커리어들을 내가 원하는 데로 바로잡으려면 시간이 아직은 더 필요했다. 만약에 내가 회사를 계속 다니지 않고 다른 걸 하더라도 이 경력이 나중에 회사를 다시 들어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경력이 곧 회사로 돌아가기 위한 보험인 셈이다.


-생계유지

앞으로의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가 사실 제일 고민이었다. 퇴사를 생각하는 모든 회사원들의 공통된 고민이고, 이 돈이라는 벽 때문에 결국 퇴사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이 봐왔다. 대충 계산해 봤을 때 퇴직금과 퇴사했을 때 받는 이런저런 해지환급금까지 합치면, 아끼고 절약했을 때 6~10개월 정도 버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회사를 나가면 다시 바로 취업할 생각은 없었다. 그 쉬는 시간을 다른 것들을 경험하면서 보내고 싶었다. 그 이후는 어떻게 할 것인지 대책이 없었다. 6~10개월이라는 시간 안에 안 해본 것들을 경험하고 쉬는 건 좋은데,  모아 놓은 돈이 떨어졌을 때가 막막해졌다.


돈을 더 착실히 모아 놓을걸 그동안 너무 헤프게 쓴 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평소에는 별로 신경도 안 쓰던 돈 때문에, 퇴사하고 싶어도 못 하는 순간이 올 줄은 몰랐다. 솔직히, 이 회사에서 이렇게 빨리 나가리라 는 생각 조차 하지 않아서 대비를 전혀 해놓지 않았다. 개발에 흥미가 떨어진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결혼

난 퇴사를 고민하기 직전에 결혼을 했다.  꽤나 오래전부터 준비했기에 결혼을 한참 준비하던 때에는 퇴사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조금 힘들더라도 결혼했으니까 더 고생해야지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혼자라면 퇴사를 고민하는 게 좀 더 편했을 테지만, 동반자가 생긴 입장에서 퇴사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내가 짊어지던 무게를 아내에게까지 나눠줘야 한다는 죄책감이 생겼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자식이 아직 없었고, 앞으로도 계획은 없으니 자식 있는 분들보다는 퇴사를 고려하는 행위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덜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결혼한 상태에서 퇴사를 고려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아내도 이제 막 작은 가게를 하나 창업해서 시작하는 단계에 있었고, 안정적인 수입이 아직 없는 상태에서 나의 퇴사가 반가울 리 없었다.


아내는 나의 편이었다. 결혼하자마자 퇴사를 고민하는 남편에게, 몸만 멀쩡하면 뭐든 못 하겠냐며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 거니까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고 나를 지지했다. 또, 돈을 많이 벌면 많이 버는 대로, 못 벌면 못 버는 대로 수준에 맞춰 살면 된다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내심 속으로는 불안했을 텐데, 저런 말을 먼저 꺼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알아서 더 고마웠다.




(2) 미래에 대한 문제들


-회사에 계속 다닐 것인가?

개발에 흥미가 떨어진 게 단순히 번아웃 때문에 단기간 동안 일시적인 현상인지 알고 싶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했지만, 2달이 지난 시점부터는 의구심이 들었다. 팀장님은 길게는 6개월~1년까지도 이런 상태가 지속될 수 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앞으로 최소 4개월 정도는 더 계속 이 상태로 지내야 한다니... 약으로 치료라도 되면 약을 먹고 싶었지만, 그냥 몸이 지쳐서 다시 회복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뼈가 골절돼서 뼈가 붙을 때까지 그냥 하염없이 기다리라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도 뼈는 엑스레이를 찍어서 경과라도 살필 수 있는데, 이건 경과도 알 수 없고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더 싫은 건 팀원들에게 짐이 되는 거였다. 내가 맡던 일 다른 팀원이 대신해주는 걸 보고만 있기가 죽을 맛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내가 일에 치여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너희도 고생 좀 해봐라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나를 기다리며 회사는 새로운 인력을 충원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퇴사 의사를 분명히 전달하지 않는 한 장기적인 팀 계획에 나를 계속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들을 회사에 앉아서 보고 있는 게 괴로웠다.

회사 책상에 앉아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노라면, 벌을 받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차라리 퇴사를 하고 새로운 살길을 찾고 싶었다.



-새로운 경험이 필요해

늘 주위에 개발이 내 천직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개발이 없었으면, 내가 무슨 일을 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정확히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 길로만 쭉 갈 줄 알았으니까. 그래서 개발에 흥미 잃은 후부터 다른 걸 해볼까라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알아봤지만, 별로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해본 게 없으니까 이건 이래서 별로일 거 같고, 저건 저래서 별로일 거 같아라며 해보지도 않은걸 생각만으로 걸러냈다.


백날 천날 개발만 했으니, 남들은 이것저것 하고 싶은걸 경험할 때 해본 게 별로 없었다. 조금이라도 어릴 때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라는 어른들의 조언이 떠오른다. 그게 지금의 나 같은 신세를 면하게 하려는 조언이었음을 깨달았다. 좀 더 다양하게 많은 것을 함께 경험해 봤다면 폭넓게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을 알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몰려왔다.


지나간 것들은 잊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라는 생각으로 아쉬움을 떨쳐버렸다. 아직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최대한 할 수 있는 것들을 경험해보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뭔가를 할 수 있을지 찾아보고 싶었다.




2. 퇴사합니다.

결국, 많은 고민 끝에 어느 정도의 계획만 세우고는 퇴사하기로 결정했다. 정말 긴 시간을 고민했지만, 회사를 벗어나는 게 옳은 판단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회사에 있는 게 날이 갈수록 답답해졌고, 돈만 가지고 버틸 수 없게 만들었다. 지금 퇴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퇴사하자라고 생각했다. 그냥 뭐라도 나이가 조금이라도 어릴 때 하나라도 경험하고, 쉬면서 나에 대해서도 좀 더 깊게 생각을 해보고 싶었다.


나에게는 새로운 목적이 필요했다. 뭐라도 좋으니 이 불안함을 없애줄 단 하나의 목적을 원했다. 회사에서 찾기보다는 더 넓은 세상에서 찾고 싶었다. 신혼여행으로 떠난 제주도에서 바라본 넓게 트인 풍경들이 너무 좋았다. 낭만이란 게 거의 없지만 그 풍경들을 보고 있자니 답답한 마음이 뚫린 것처럼 시원해졌다. 회사에 돌아와서는 사무실이라는 공간 그중에서도 작은 책상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다.


틈만 나면 밖에 나가서 바람을 쐬고 왔다. 책상에 앉아 있을 때면, 물속에서 숨을 참는 것처럼 답답함이 차올랐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참아낸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어쩌면 퇴사를 고민한 순간부터 이미 내 마음속에서는 퇴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걸 지도 모르겠다.


퇴사를 고민하기 위해 이미 수많은 생각과 고민들을 곱씹어 왔고, 퇴사를 고민하기 전에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도 하고 대안을 찾기도 했다. 갑자기 어느 날 퇴사하고 싶다! 라며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다들 저마다 짧고 긴 시간 동안 많은 고민을 거쳤을게 분명하다.


팀장님을 따로 불러 퇴사하겠다는 의견을 전달하고, 부서장님과 면담을 통해서 사직서를 제출했다. 회사에서 개발을 안 하는 몇 달 동안 그룹원이었던 팀원이 내 일을 맡아서 하고 있어 따로 인수인계는 필요하지 않았다.

문서들을 정리해서 전달해준 후에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내게 남겨진 일이라고는 퇴사 날짜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막상 진짜 퇴사한다고 하니 아쉬움도 있고, 불안하기도 했다. 회사의 상황도 알기에 마음이 편치도 않았지만, 그래도 홀가분한 마음을 억누르지는 못 했다. 퇴사하는 입장이지만, 회사에 남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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