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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껌정호랭이 Black Tiger Aug 23. 2023

16. 외할머니 아니! 우리 할머니가 무척 그립습니다.

인간들의 불행과 행복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돈도 명예도 사랑도 수 없이 많은 조건들이 따라붙겠지만 불행과 행복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 아니 우리 인간의 생각 차이 아닐까요?


오늘은 불행하다고 느끼기보다는 행복하다는 시간에 포인트를 두고 그 관점을 풀어 볼까 합니다. 왜냐면 그분은 평생을 불행하게 사시면서도 본인이 불행하다는 말씀을 단 한 번도 하시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바로 외할머니 아니 우리 할머니입니다. 


진실 씨는 친 할머님은 진실 씨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셔서 뵙지도 못해 사랑을 받아 보지도 못했지만 친 할머님의 어떤 사랑 보다도 더더욱 찐한 참사랑을 평생 베풀어 주신 외할머님의 사랑을 받고 자랐고 이 사랑을 지민이까지 내리사랑으로 주신 분이기에  우리 할머니라 부릅니다.


"지름(기름) 사세요" "새우젓 사세요" "빵(찐빵) 사세요" "새비(마른 새우) 사세요""소금 사세요" 등등 많은 장사치들이 이른 새벽부터 온 동네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외치는 소리에 선 잠을 깨곤 했다. 


거기에는 진실 씨 할머니도 젊은 시절 한 부분을 담당했던 분이셨다. 외할아버님이 일제 강제 징용에 끌려가 탄광에서 일을 하시다가 오른쪽 다리를 많이 다치시는 바람에 본의가 아니게 불구가 되어 겨우 목숨만 건저 고향으로 돌아는 오셨지만, 오른쪽 골반이 으스러져 다리 한쪽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다 보니 농사일은커녕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징용의 악몽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시고 화병에 사로 잡혀 사셨다.


외할아버지는 그 화를 삭인다는 명목하에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겨우겨우 지팡이에 의지 한채 매일매일 동네 어귀 주막에 가서 막걸리를 드시다가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술이 취한 것도 있는 데다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본인 생각과 다르게 몸이 움직여 지질 않아 소변 대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셨다. 따라서 해 질 녘이 되면 외가댁 식구들은 매일매일이  외할아버님 모셔와서 주무시게 하고 빨래를 하는 것이 하루 일과 중 제일 큰일이 되어 버렸다. 다른 일로 지친 식구들은 하루에 몇 번씩 빨래를 해야 하다 보니 불평불만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생활은 해야 했기에, 이제 갓 20살이 넘은 젊고 소중한 막내딸을 외지로 내보내서 돈을 벌어 오라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전답이 많아 다른 분들한테 빌려 주고 소작료를 받아 생활할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체격도 작고 가녀린 할머님께서 새우젓이나 황석어젓 멸치젓 등을 받으러 법성포항 젓갈시장에 가기 위해 새벽 일찍 산속 비탈길을 10여 km나 걸어가서, 매번 그 계절에 맞는 그날그날의 신선하고 저렴한 젓갈들을 한광주리 받아서 머리에 이고, 다시 인근 마을들을 돌아 다니시며 젓갈을 팔아서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10여 km의 새벽녘 어두운 산속길을  여자 혼자 터벅터벅 이슬방울을 걷어차면서 걸어갈 때는 어디선가 푸더덕하는 꿩의 날갯짓 소리만 나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웠고, 저 멀직이 풀 숲에서 반짝 거리는 반딧불이 만 보여도 뭔가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눈동자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곳에 나 산길 옆에는 산소들이 여기저기 있었고, 또한 당시에는 사람들이 죽으면 돈이 없어서 묘소 자리를 구하지 못하거나 미신으로 안장날자를 확인해서 살아 있는 사람들한테 좋지 않다고 하면, 임시로 짚으로 마람을 엮어 시체를 덮어 놓는 풍습이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금방이라도 시체가 살아나서 다가올 것만 같은 공포감에 눈을 번쩍 뜨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걸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같은 마을 아랫동네에 살면서 할머님처럼 법성포항에서 찐빵을 떼어다가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장사하는 덕암댁을 만나서 같이 동행하는 날에는 무슨 보물이라도 주운 것처럼 서로가 든든하고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새벽길을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판매하는 업종이 다르다 보니 어쩌다 한 달에 한두 번 외에는 그 무섭고 두려운 산속 길을 거의 매일 할머니 혼자서 가슴 졸이며 다녀와야만 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오신 보람으로 할머님은 생활비는 물론이며 논과 밭도 이제는 제법 장만을 하셨다. 이제는 힘들고 무서운 새벽 장사일은 그만하셔도 논농사와 밭농사만 지으셔도 외할아버님 할머님 이모 세 식구가 생활하는 데는 큰 불편 없이 충분히 하고도 조금은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때부터는 안정된 환경에서 행복하게 나날을 영유하고 있었는데 당시 정부에서는 농촌 살리기 운동 새마을 운동 퇴비증산운동 등 별의별 정책들을 다 내놓으며 농민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독려했다. 그중에서도 농촌의 젊은 청년들에게는 4H운동이라는 청소년 지도사업 활성화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이 운동에는 젊은 이제 갓 20이 넘은 이모도 참여해서 열심히 활동을 했다. 당시 이모 연배들은 겨우 초등학교가 배움의 다였기에 그중에서도 머리가 좀 트인 사람들이 마을 대표로 남자는 회장 여자는 부회장으로 선발되어 군청이나 도청에 자주 모여서 합숙으로 교육을 받는 등 객지에서의 활동이 많았다.


이모는 한참 열성적으로 마을대표로 부회장을 맡아 4H 활동을 하던 중 배가 자꾸 아프다면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상하게 생각한 할머님은 이모를 추궁해서 결혼도 하지 않은 이모가 임신을 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 입장에서는 동네는 물론 온 세상천지에 이 소식이 소문나면 아직 어린 막내딸의 혼사길에 문제라도 생길 까봐 어떻게든 숨기기에만 전전긍긍하셨다.


정상대로라면 임신 초기였음으로 사실을 쉬쉬하고 결혼식을 올려 주면 모든 일이 아무런 문제 없이 묻히겠지만, 불행하게도 이모와 눈이 맞았던 사람은 이모와 결혼이 불가능한 외할머님 언니네 딸 즉 할머님 조카딸 시댁 집안 아들이었다. 할머님은 사돈 지간에 결혼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한 동네 사람과 눈이 맞아 결혼도 하지 않은 어린 처자가 임신을 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할머니는 다음날 이른 새벽 바로 이모를 억지로 끌고 읍내에 있는 정광병원이라는 작은 병원으로 데려갔다. 이 사실은 진실 씨네 부모님께도 쉬쉬 하시면서 단 둘이서만 모르게 진행된 일이라서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병원에 도착한 이모는 울며 불며 할머님께 매달려 유산은 싫고 그 사람하고 결혼해서 서울로 가서 살겠다고 발버둥을 첬지만, 할머님이 허락할리는 만무했다. 할머님의 성화에 못 이긴 이모는 눈물범벅이 된 채 자포자기 상태로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포기하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할머니의 생각대로만 진행되었다면 둘만의 비밀로 평생 간직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련만... 


수술실에 이모가 들어간 후 한 시간이나 흘렀을까 마침 당일이 장날인지라 환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는데 환자를 챙기기보다는 왠지 불안하게도 수술실로 직원들이 계속해서 왔다 갔다 했다. 처음 겪어 보는 할머님은 그러려니 기다리고 있었으나, 몇 시간이 지나도 이모는 나오지 않고 병원에서도 아무런 말도 없었다. 진행상황이 궁금해 카운터에 수술 끝났냐고 몇 번을 물어보아도 기다리고 계시라는 말 뿐이었다. 


점심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어 아침부터 식사도 거른 체 할머님은 하루 종일  대기실 나무의자에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으로 쪼그려 앉아 이모가 건강하게 걸어 나오는 생각만 하면서 수술실을 처다 보고 있을 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오전 진료를 끝으로 정광병원은 웬일인지 밀려오는 환자들을 진료가 안된다면서 다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장날만을 기다리면서 아픔을 참아 왔다는 사람들의 항의 섞인 하소연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으나 모든 걸 무시 한채 병원문은 굳게 닫혀 젔고, 병원 대기실에는 할머니 혼자 덩그러니 내 던져 있을 뿐 누구 하나 거들떠보질 않았다.  


몇 시간 만에 전해진 이모의 소식은 안타깝게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하늘나라도 아무런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날아가 버린 후였다.


시골 읍내 일반 진료병원에서 산부인과 전공도 아닐뿐더러 경험도 전무한 나이많은 의사가 애초에 불가능했던 임신 중절 수술을 한다고 시도한 자체부터가 이미 잘못되었던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진실 씨 부모님은 불야불야 읍내 병원에 도착해서 이모와 할머님의 상태를 확인한 결과 이모는 이미 돌이 킬 수 없는 상황이었고, 할머님 마저 본인 잘못으로 자식을 죽였다면서 혼절해 눈물만 줄줄 흘리고 계실 뿐이었다.


이 사실은 외할아버님께는 도저히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본인 자책에 힘들어하시는데 거기에 아들도 없이 딸만 둘을 둔 입장에서 옥이야 금이야 키워 오셨는데 그것도 막내딸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할아버님 또한 큰 변고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진실 씨 부모님은 외할아버님께는 이모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이모 장래식을 조용히 치러야만 했다.


장래식날 이모와 마지막이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듣고 어린 진실 씨도 부모님을 따라 정광병원에 도착했다. 누구보다 큰 조카라며 귀여워하고 사랑해 주던 이모였는데...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고 사랑도 받을 수 없다니.. 무슨 일인지 잘 이해는 가지 않지만 눈에서는 마지막이라는 그 글귀가 머릿속을 휘감으며 눈물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죽음"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진실 씨 가슴속에서는 두려우면서도 무섭기도 슬프기도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상태에서 맞이한 이모의 마지막 모습은, 어린 진실 씨가 느끼기에는 평상시 집에서 잠을 자던 20대 이모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눈만 감고 있고 입술이 조금 파랗게 변했다고 느낄뿐... 진실 씨는 이불에 덮여 얼굴만 겨우 보여 주고 있는 이모를 향해 "이모 이모 "를 수없이 부르면서 이모 몸을 흔들어 보지만 끝내 이모는 그렇게 사랑해 주던 조카의 얼굴을 처다 보지도 않았고 사랑한단 말 한마디 해 주질 못했다.


그처럼 23살의 젊은 나이에 불의의 의료 사고로 세상을 떠나 읍내 어딘지 모르는 뒷산 공동묘지 남들 묘와 묘 사이 한쪽 구석에 봉분(封墳)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평평하게 다져진 땅속에 고이 잠들고 말았다. 당시에는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하면 원래 봉분을 하지 않는다는 풍습도 있었고, 이런 좋지 않은 사실이 마을에 알려지면 이 또한 체면이 아니라는 할머님의 간곡한 요청에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사망해서 읍내에 묻고 왔다고만 하고 조용히 넘어갔다.


한참이 흐른 후에야 진실 씨는 부모님께서 할머님 몰래 매년 추석 때마다 이모님 묘소에 가서 벌초를 해 오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딱 한번 벌초를 따라가서 큰 조카라며 그토록 사랑해 줬던 이모님의 묘소에 인사를 드렸었으나, 그 이후로는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본인의 나태함으로 인해 찾아 가질 못하는 사이 그 지역도 개발이 되면서 지형지물이 많이 변해 버려서 대충의 위치만을 기억할 뿐 이제는 영영 찾을 수 없는 무연고 묘가 되어 버리도록 챙기지 못한 죄책감에 마음이 좀 아팠다.


그렇지만 이제부터가 진실 씨네 집안에서는 일이었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막내딸이 하루 이틀 며칠이 지나도 집에 돌아오지 않자 외할아버지는 무슨 변고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시고 식음을 전패하셨다. 거기에 할머님도 본인이 잘 못해서 금쪽같은 자기 새끼를 죽게 만들었다고 자책하고, 본인도 따라 죽어야 한다면서 가슴을 지속적으로 내려치고 식음을 전패하고 눈물만을 흘리 셨다.


연세가 있으시고 매일처럼 술에만 의지 하시고 식음을 전패하시던 외할아버님은 5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슬픈 사연을 가슴에 품은 채 이모 곁으로 가시고 말았다. 외할아버님 장례를 치르는 날 본의 아니게 외동딸이 되어 버린 어머님마저도, 부모님들이 너무나 슬퍼하시기에 안타까운 동생의 죽음에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겉으로는 표현을 못하고 가슴으로만 품고 흐느끼면서 참고 계시던 어머니의 슬픔이 폭발하면서 외할아버님 영정 앞에서 그만 혼절을 하시고 말았다.


진실 씨는 처음으로 맞닥뜨린 어머님의 혼절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머님께서 일어나지 못하고 또 한 번 큰일이 벌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과 두려움에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풍습에 슬픔은 돌아 가신분이 다 가져가셔야 한다면서 외할아버님을 모시기 위해 준비해 둔 꽃상여 속에 혼절하신 어머님을 눕게 하고서 한바탕 상두꾼들이 상두소리를 외치고 나자 거짓말처럼 어머님은 정신을 차리셨다.


외할아버님의 장지는 그래도 마지막 남은 자식 진실 씨 어머님과 유일한 사위인 아버님 두 분이서 열심히 노력해서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 놓은 새밭이라는 밭의 한가운데에 모시고 아들도 없이 무남독녀 외동 사위인아버님이 매일매일 관리 하시겠다고 하셔서 거기 새밭에 모시기 위해 땅을 파는데 평생을 좋은 일들만 하시고 남에게 피해 한번 입히지 않고 살아오신 분이라서 그런지 그 묏자리 땅이 마사토로만 이루어진 얼마나 좋은 자리인지 누가 보아도 명당자리라고 칭찬들을 하시던지 어린 시절 진실 씨 기억 속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이모와 외할아버님이 떠나신 후로도 할머님은 몇십 년을 자책하면서 괴로워하셨다. 한동안은 텔레비전에서 젊은 여자들만 나오면 이모와 닮았다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바람에 진실 씨네 집에서는 음악 방송은 아예 볼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슬픔은 시간이 흐르면 잊혀진다" "아픈 이별도 흘러가는 세월을 이길 수는 없다"라고 누군가가 말을 했듯이 할머님도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모에 대한 자책감은 서서히 줄어 갔다. 가슴에는 스스로의 자책으로 움푹 들어간 흉터만 선명하고 그때부터 식사양은 줄어 들대로 줄어드는 바람에 한 두 숟가락이 전부이다 보니 허리가 휘고 아랫배만 쭈그러진 가죽으로 채워진 채 평생을 사셨다.


그러나 기억력은 너무나 총명했다. 오로지 진실 씨가 1순위 그다음이 어머님 그리고 식구들이었다. 그 힘든 몸으로도 진실 씨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은 물론 이거니와 지민이도 세 살까지 키워 주셨다. 그 이 후로도 총명하고 건강하게 어머님과 두 분이서 말로 표현은 잘 안 하셨지만 서로의 본능적인 감정으로 서로를 위로하시면서 98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다가 온 가족이 즐겁고 풍요로운 추석을 잘 보낸 다음날, 외할아버님 이모님이 계시는 행복 속으로... 하늘나라로 편안하게 가셨다.


평생을 외롭고 슬프게 살다 가신 할머님이기에 진실 씨와 남동생이 사후세계에서 만이라도 좋은 곳으로 가셔서 영면 하실 수 있도록 축원해 달라며 자그만 암자에 모시고 49제까지 정성 들여 모신 후에 좋은 곳으로 영원히 보내 드렸다.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셨고 불행 속에서도 사랑을 주고 가신 할머님은 장례식장에 공식적으로 누구 한분 초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많은 주위분들이 장례식장을 찾아 주셔서 너무나 감사했고 불쌍하게 평생을 살아오신 할머님도 외롭지 않게 하늘나라로 가실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자손들이 없는 일반 묘지는 관리하는 사람이 없게 되면 잡초투성이가 되면서 무연고 묘지가 되어 얼마 가지 못해 없어 저 버리는데, 나중에 진실 씨가 없더라도 무연고로 없어지는 불쌍한 묘지가 아닌 영원히 편안하게 고이 잠드실 수 있는 커다란 고인돌 아래에 외가쪽 모든 가족분들을 다 함께 모셨고, 그리고 조그만하지만 화단과 작은 재단을 놓고 둘레에 나무를 심어서 아담하게 꾸며드렸다. 


그리고 매년 명절언저리에는 진실씨 형제들이 아니면 찾아줄 사람 없는 외로운 할머님 가족 묘소를 매번 잊지 않고 찾아뵙고 관리하고 있다.


그토록 자손들을 위해 사랑만을 베푸시고 가족들에게 조금의 피해도 주시기 싫다고 하시면서 90이 넘은 연세에도 손수 빨래를 해서 항상 깔끔하게 입으셨고 머리카락 한 톨 흐트러짐 없이 곱게 관리하셨고, 이제는 연로하셔 힘드시니 함께 살자는 진실 씨 어머님의 각 곡한 부탁도 자손들에게 불편을 준다면서 거절하시고 본인의 집에서 혼자 쓸고 닦고 하시면서 평생을 진정 올곧은 삶의 표본을 보여 주신 후, 좋은 곳으로 가셨을 우리 할머님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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