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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nc 블랑 Jun 23. 2018

야자수와 이방인

함께 풍경이 되기로 해


해가 높은 계절로 접어 드는 요즈음, 매일의 상상 속에도 덥고 느린 바람 속 흔들리는 야자수 이파리들이 부쩍 자주 들어온다. 이국의 풍경 속 가장 먼저 달려 오는 건 그 동네의 식물들이다. 키가 크고 기둥이 곧고 넓은 이파리를 가진 나무들, 여기엔 없지만 그 곳엔 많은 것. 낮의 열기를 놓아주지 못한 여름 저녁의 공기는 종일 소멸되지 않은 타이페이의 기억을 증폭시키는 밤의 이파리가 되었다.



대만국립대학교 중도에서의 야간 산책. 존재를 일러준 이가 야자수길이 참 예쁘다고 했다. 밤하늘을 배경 삼아 펼쳐진 거대한 나무들의 실루엣을 마주했을 때 그가 메모를 적어주며 꼭 가보라 한 이유를 알았다. 그것은 내가 전에 본 적 없던 '이국적' 인 그림, 곧 '상상속의 남쪽 나라' 였다.

다음 날 낮에 다시 학교에 가서 나무들을 관찰했다. 학교 안에는 중도 양쪽을 채우는 하늘만한 친구들 뿐 아니라 눈높이에서 자세히 볼 수 있을만한 키의 아이들도 있다. 발을 멈춰 서서 연하늘색 배경과 대비되는 짙은 이파리들을 오래 보았다. 기둥에서 뻗어 나오는 줄기의 흐름, 잎이 갈라지고 꺾어지거나 늘어지는 모양새, 색깔과 윤기, 태양이 지나갈 때의 빛과 그림자.


곁에서 천천히 본 그들은 내가 여태껏 관성적으로 그려왔던 것과 확연히 달랐다. 그 동안 내가 그린 건 야자수 라는 이름의 기호화된 이미지에 가까웠던 것이다. 옆에서 눈을 맞추고 알려 하기 전의 나는 실제 존재로서의 야자수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장소의 주인인 야자수들에게는 내가 어떤 존재였을지. 나무의 말을 알 수 없지만 그들끼리도 나를 두고 관찰의 말을 떠들었을지 모르겠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오래도록 살고 있는 국립대학교 안 나무들에게 나라는 사람은 전에 본 적 한 번 없는 이방인이었을 테니까.

그들은 낯선 내게 질문이 없다. 나를 하고많은 대답의 세계로 밀어 넣지 않는다. 야자수 이파리를 빌어 그늘에서 쉬어가고 싶은 이에게 갑자기 고개를 홱 트는 심술도 부리지 않는다. 거대한 이국의 풍경 속에 묻히고 싶은 사람을 그대로 풍경이 되도록 놓아 둔다. 풍경 안에서, 잎사귀들과 나는 바람속에 그저 흔들릴 평온함을 공유한다.


어느 날 무슨 연유로 야자수들이 이 곳에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타국에서 온 생명들이 생소한 환경에서 아프거나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그들이 잘 적응하길 바라는 사람들은 여기가 익숙한 자신들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미지였던 서로는 가까이에서 자주 봄으로써 실체가 되는 기회를 갖는다.
말이 다르던 사이에 서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함께 해서 무엇이 변할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래도 일단 이파리 그림자 아래 폭풍우를 피하게 해 주는 것은, 풍경의 수적 다수를 점하는 쪽에서 해 줄 수 있는 일이다.



해가 높은 계절로 접어 들었다. 이국의 야자수들이 혼자인 나를 받아들이던 기억을 떠올린다. 뜨거운 태양을 견뎌 내기 위해, 서로의 다정한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한다. 열기가 물러가는 선선한 밤의 때가 오면, 우리는 서늘한 바람을 타고 후련하게 흔들리는 나란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태양이 아프도록 강렬한 때, 홀로 있는 아직은 낯선 이에게 말해 본다. '함께 풍경이 되기로 해.'


Soyeon Na, Blanc

노마드미술기자/아티스트


일간지 미술기자로 재직 후 퇴사, 세상 어디든지 사무실 삼는 '노마드미술기자' 로, 신문 디자이너이자 호기심 많은 미디어 콘텐츠 관찰자로 산 지 십 년 째. 일러스트레이션 아티스트로서 파리에서의 국제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마치고 서울에 머물며 그림과 글을 만든다. 최근 영감의 원천은 여행과 케이팝, 좋아하는 단어는 '사랑'과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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