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내포구 앞 숙소에서 밤새 파도치는 소리와 눈이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까 아직도 눈보라가 치는 소리가 들린다.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하지만, 오늘은 걷지 않고 눈이 그칠 때까지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일단은 우의를 입고 단단히 채비를 하고 나섰다.
바람이 불고 눈이 비와 섞어서 오기 때문에 아직 도로에 쌓인 것은 없었다. 바람은 여전히 걷기 힘들 정도로 세차게 불고 있다.
바다의 파도는 집채만 하다는 표현을 해도 될 만할 정도로 높다.
인적이 보이지 않는 해안 길을 따라서 올레길 16코스를 시작했다.
바람이 불거나 눈이 내려도 올레길 파란과 분홍 리본은 늘 눈으로 찾으면서 걸어간다. 눈에 젖어서 리본이 감겨서 펄럭이지 않으면 눈을 크게 뜨고 찾기도 했다.
애월 해안로를 따라서 걷는 올레길은 좋은 풍광이지만, 지금은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으로 구경할 여유가 없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섞이지 않는 눈만 내리더니, 간간이 싸락눈이 내릴 때는 눈이 아프다. 싸락눈이 올 때 바람이 정면으로 불면 한참을 뒤로 돌아서 있기도 했다.
중간쯤에 몽고에 항쟁했던 애월 땅이라는 비석과
애틋한 사랑을 의미하는 종도 애월 해안로에 서 있고,
이 길은 해안선을 따라 난 아름다운 길이다.
바다에서 막힘이 없이 불어오는 눈바람은 그 세기가 걷기가 힘들어 뒤로 물러나기를 여러 번 했다. 해안 도로에 있는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이 있는 곳으로 빨리 뛰어가고 싶지만, 뛰어가다가 발이 모두 땅에서 떨어지면 날아갈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렇게 눈바람을 맞으면서 올레길을 걸어야 하는 절박함은 없지만, 한번 시작한 길이니까 끝을 보려는 단순한 마음이 계속 걷게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힘든 길을 걷다 보니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렇게 힘들게 걷고 나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될 것 같고, 더 깊이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냥 길이 있으니까 걷는 것이라는 것으로 생각을 정리한다. 그리고 이렇게 고생하고 난 다음에는 점심을 맛나게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희망을 갖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일 것이다.
애월 해안로를 따라서 걷다가 보니까 구엄리 돌염전이 나온다.
지금은 바닷가 돌 위에 그 형태만 남아서 관광거리가 되지만 예전에 소금을 만들었던 곳이다. 돌염전을 구경하려고 내려갔지만 너무 바람이 불고 파도가 올라와서 쫓겨서 다시 올라왔다. 그곳에는 이제 작은 공원이 되어있는데, 돌 속에 묻힌 고등어 머리와 꼬리 조형물이 구경거리이다.
이제 해안선을 벗어나서 내륙으로 들어오니까 바람을 막아주는 것이 많아서 걷기가 조금 수월하다. 이제는 눈이 제법 쌓여가고 사람들이 다니지 않으니까 내가 눈이 내린 길을 처음 걸어가는 곳이 많다.
길은 수산봉 정상으로 향해서 수산봉 산길을 올라간다. 그렇게 높지 않은 곳이지만 산길에 들어가니까 눈바람을 막아주니까 오르막이지만 걷기가 더 수월하다.
수산봉 정상에는 별로 특이한 곳이 없는 평범한 정상이고
내려오니까 수산저수지가 나온다. 수산저수지를 바라보면서 큰 소나무에 메어 놓은 그네가 인상적이다. 멀리 수산저수지를 바라보면서 그네를 타는 것도 풍류가 있을 것 같다.
수산 저수지를 따라서 걷다가 보니까 리본이 보이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리본의 색깔이 이상하다. 파란과 분홍이 아니라 다른 색깔의 리본이다. 저수지를 따라서 색깔에 신경 쓰지 않고 펄럭이는 것만 보고 따라오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이다.
다시 길을 찾아서 뒤로 돌아 나오니까 갈림길에 담벼락에 붙은 청색 화살표가 보였다.
그것을 보지 못하고 펄럭이는 리본만 본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 다른 길을 안내하는 너무 많은 리본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계속 눈 내리는 들판을 걸어오니까 예원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도 움직이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마을의 집 벽에 올레길 16코스가 알기 쉽게 잘 그려져 있다.
돌담에 쌓아놓은 돌들은 다듬지 않고 생긴 대로 쌓아 놓은 것이 작품이다. 이렇게 쌓는 것도 전문적인 석공의 기술에 속할 것 같다.
항파두리 토성길로 가는 눈길은 아직 아무도 걷지 않아서 내가 처음으로 발자국을 내고 걸어간다.
토성길 정상을 넘으니까 아직 항파두리 토성을 발굴하면서 조성 중에 있다.
온통 눈밭이 된 토성 옆에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나무가 이름은 모르지만 한 그루 폼 나게 조성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