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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지엥 Sep 04. 2021

코로나 이후 다시 프랑스

-2부-  17세기에 문을 연 카페가 아직도 파리에서 영업을 한다고?

   1부에 이어서 이 스토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파리에 처음 커피가 들어온 것은 파리에 주재했던 오스만 제국의 대사였던 술래이만(Suleiman)이 화려한 저택을 빌려서 멋지게 꾸며놓고 파리의 명사들을 초청한데서 시작됐다고 본다. 당시 술래이만의 초대에 모인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는 바로 검은 물 커피였던 것이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했던 커피를 대접하면서 취득한 고급정보를 오스만 제국으로 넘기는데 커피를 활용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시 파리 사교계에서는 검은 콩인 커피원두를 어떻게 추출해야 가장 맛있는 커피가 되는지가 논쟁이 될 정도였다고 하니 17세기 중반 당시 파리사교계와 커피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사회적인 커피의 인기에 힘입어 파리 오데옹 지역에 드디어 최초의 카페가 문을 열었으니 그게 바로 앞에서 말한 카페 ‘르 프로코프’였던 것이다. 오데옹 지역은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가 근처이자 프랑스 최고의 연극 국립극장이 있는 곳이어서 사상가들은 물론이고 연극배우, 극작가 등의 출입도 매우 빈번했던 곳이고 우리가 일만한 프랑스 유명인들이 모두 단골이었던 카페였다. 

  르 프로코프는 문을 열자마자 파리지성인들의 집합소 역할을 했는데 특히 계몽주의자들이 날마다 들락거렸으며,  프랑스 최초의 백과전서를 편찬했던 디드로(Diderot)의 경우는 주로 이 카페에서 백과전서 집필을 했고, 볼테르(Voltaire)도 여기서 하루에 커피 12잔을 마시며 사색을 했다고 한다. 그는 “커피가 정말 독약이라면 그것은 천천히 퍼지는 맛있는 독약이다”라고 하면서 커피 애찬론을 펼쳤던 사상가였다고 한다. 

   이들 유명한 사상가들 외에도 유럽을 호령했던 작은 거인 나폴레옹도 청년 장교(중위) 시절 이 르 프로코프 카페의 단골이었는데, 어느 날 커피를 여러 잔 마신 후에 돈이 부족했던 나폴레옹은 외상값 대신 자신의 멋진 모자를 맡겼고 이 모자가 지금도 카페에 전시되어 있다. 아마도 외상값을 갚고 모자를 찾아갔어야 할 나폴레옹이 이후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면서 황제가 되고 유럽 정벌을 다니느라 르 프로코프 카페에 맡겼던 모자를 깜박 잊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살아생전 약 120여 개의 모자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지난 2014년 경매를 통해 한국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또한 르 프로코프는 혁명의 산실이기도 해서 혁명 당시 리더 중 한 명이었던 자크 르네 에베르의 경우 장 폴 마라, 당통 등과 함께 매일 밤마다 이곳 르 프로코프에 모여서 혁명에 대한 당위성과 작전 등을 논의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혁명 이후 발생한 여러 건의 크고 작은 혁명과 폭동 등이 여기서 논의됐고 실행에 옮겨졌던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의 상징적인 물건처럼 여겨지는 ‘프리지안 모자’(혁명 때 자유의 상징으로 머리에 썼던 붉은 모자)도 바로 이 카페 르 프로코프에서 처음 시작됐다. 

   참고로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를 거쳐 중동지방에 들어온 세계 최초의 카페는 1475년인 15세기 중반 무렵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현 터키, 이스탄불)에 문을 연 ‘키바 한(Kiva Han)'이라는 카페였다. 당시 오스만 제국과 활발하게 무역을 주고받던 베네치아의 항구를 통해서 커피는 베네치아로 들어오게 됐고 결국 유럽 최초의 카페인 ’카페 플로리안(Caffé Florian)이 생겨났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커피를 최초로 마시고 좋아했던 사람은 고종황제라고 알려져 있으며 커피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 젊은 프랑스 형제에 의해서였다. 1900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당시 우리나라가 전시한 고종황제의 초상화와 조선관을 보고나서 입국한 형제였는데 폴 플레장(Paul Plaisant) 과 안톤 플레장(Anton Plaisant) 형제였다. 이들 형제는 한국에 와서 나무땔감 장사를 통해서 많은 이득을 본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나무짐꾼들에게 나무를 사면서 돈이 충분치 않으면 대신 서양에서 가져온 검은 물, 즉 커피를 줬던 것이다. 당시 나무꾼들은 서양 사람들이 주는 따끈한 국이라고 생각해서 이 커피를 ’양탕국‘이라고 불렀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서 서양의 문물인 커피를 공식적으로 접하게 됐을까? 여기에는 우리의 아픈 과거가 있는데, 바로 ‘아관파천’이었다. 1896년 2월 11일, 이 날은 한국역사에서 매우 특별한 날인데 단일왕조로는 세계 최장수였던 이씨 조선왕조가 실질적인 종말을 고한 날이기 때문이다. 을미사변 이후 언제 암살을 당할지 모른다는 신변의 불안감이 있었던 고종은 왕궁을 떠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이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있는 동안 고종황제는 다양한 서양문물을 많이 경험하게 됐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커피였던 것이다. 즉 우리나라 커피의 역사는 아쉽게도 나라의 비극을 통해서 시작됐던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 생활을 끝내고 다시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당시 마셨던 검은 물, 즉 커피의 맛을 잊지 못해서 궁에서 경치 좋은 곳에 ‘정관헌’이라는 멋진 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왕실사람들, 대신들, 외국사절들과 함께 고종이 좋아했던 고전음악과 함께 커피와 다과를 나눴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카페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곳은 왕실과 고위대신들 전용이었고, 이후 일반인들이 올 수 있는 좀 더 대중적인 최초의 커피숍은 1902년 서울 정동에 세워진 ‘손탁 호텔’을 통해서였다. 러시아 공사의 처형이었던 독일계 러시아인이었던 손탁(A. Sontag 1854~1925)에게 아관파천 당시 많은 도움을 받았던 고종은 그녀에게 정동에 있는 건물을 주었고 이게 손탁 호텔이 됐던 것이다. 이 호텔 1층에 사람들이 모여서 정치, 사회문제를 논하는 사교클럽이 생겼는데 이게 바로 ‘정동구락부’였다. 이곳에서는 음식과 술은 물론이고 고종이 좋아했던 커피도 마시면서 사교를 할 수 있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호텔 커피숍이었던 것이다. 즉 일반인들도 올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숍은 호텔 커피숍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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