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애정하는 시 4
물 위를 걸으며
정호승
물 속에 빠져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물 위를 걸으면
물 속에 발이 빠지지 않는다
물 속에 빠져
한 마리 물고기의 시체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물 위를 걸으면
물 속에 무릎이 빠지지 않는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주어진
물 위를 걸어가는
이 짧은 시간 동안
물 속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
출렁출렁 부지런히 물 위를 걸어가라
눈을 항상 먼 수평선에 두고
두려워하지 말고
얼마 전 여의도에서 만난 동기 방송작가 언니가, 친한 작가 선배가 집필하는 드라마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내심 부럽기도 해서 물어보니 박민영, 서강준이 각각 여주, 남주로 나오는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라는 jtbc 드라마였다. (지금은 종영한 방송이라 방송사와 작품명을 밝힌다)
두 배우의 케미도 기대됐지만 드라마 제목도 맘에 들고 아는 작가가 대본 작업에 참여를 한다니 기대가 되어서 1회를 보고 난 나의 소감은...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인지 두 주인공은 순정 만화 속 캐릭터처럼 너무나 예쁘고 멋졌고, 전반적인 드라마 분위기는 '북현리'라는 가상의 마을(검색해보니 평안북도 용천군 쌍학리 영역에 있던 폐리라고 나옴. 1952년 쌍학리에 편입되면서 폐지)과 '굿나잇 책방'을 중심으로 겨울만의 알싸하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한 사람을 향한 오랜 기다림, 첫사랑의 순수함이 외로움에 지쳐 돌아온 사람을 어떻게 감싸 안아주는지... 그런 감동과 여운이 느껴져서 좋았다. 엔딩도 맘에 들고.
잠깐 드라마 이야기에 빠져서 죄송. 내가 뜬금포로 이 드라마 이야기를 한 건 이유가 있다. 그 안에서 '시'가 두 주인공의 감정선을 건드리고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시집이 아예 대놓고 소개되기 때문이다. 좋은 시들이 많으니 가져가서 읽어보라고 권할 정도의 시집. 정말 그럴만하다. 드라마를 보던 나도, 이 시집을 기억에서 떠올리게 됐고 어버이 날을 맞아 들른 부모님 집에 도착하자마자 내 방에 들어가 시집을 꺼내 들어 읽었다. 얼마나 오래 내 책장 한 켠에 꽂혀있었는지 모서리가 빛이 바랬고, 맨 첫 장 우측 하단에는 '2005년 1월 28일. 수정' 이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책을 사면, 구입한 날짜와 내 이름을 적어두는 습관이 있다) 감수성 풍부하던 대학교 1학년 국문과 여학생 시절에 이 시집을 처음 읽으며 느꼈던 감동은 16년 후의 지금도 그대로였다. 보석이 알알이 박혀있는 것 같은, 평생을 두고 읽고 싶은 시집.
오늘 적은 시는 정호승 시인의 또 다른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에 실린 <물 위를 걸으며>라는 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실린 시는 아껴뒀다 나중에 소개하겠다) 주옥같은 시들이 많지만 그냥 이 시에 대해 한번 떠들고 싶었다. 신이 아닌 이상, 물 속에 빠져서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딨을까. 세상에 있다 해도 그건 엄청난 내공을 닦은 고수이거나 원래 타고난 초능력자겠지.
하지만 시인은 과학적인 원리나 증명을 몰라서 이렇게 적은 것이 아니다. 살다 보면 깊은 물 속에 빠져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과 두려움이 몰려올 때가 있다. 아무도 내가 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러다 점점 가라앉는 나 자신의 무게가 느껴지고, 그러다 보면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나는 물 밖으로 나갈 일이 없다, 다시는 저 위로 올라갈 수 없고, 나는 이제 여기서 남은 인생을 마치겠구나, 모든 것을 체념한 체...
그때 시인은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라고, 한 마리 물고기의 시체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라고 권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짧은 시간. 인생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주어진 시간이라 생각하라고. 그러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다. 다 버리고 훨훨 가벼워진다. 그러면, 어느새 나는 출렁출렁 부지런히 물 위를 걷게 되는 것이다. 자, 정리하자. 물 위를 걷는 방법. 첫째, 시선은 지금이 아니라 먼 수평선에 둔다. 둘째, 두려워하지 않는다.
현재에 집착하면 상황이 주는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서 죽지만, 죽음을 초월한 먼 미래에 시선을 두면 기대와 소망을 안고 가벼워져서 영원히 죽지 않는 그런 세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