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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글 Oct 10. 2022

건강하게 죽어가고 싶어요 _1

  

류마티스내과 외래 진료가 있는 날이다. 검사가 있는 날이면 긴장된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외래 진료 전날부터 긴장된 마음에 잠도 깊이 잘 수 없었는데, 현재는 긴장된 마음이 조금은 이완이 되어 나아진 편이다. 채혈실에서 소변과 피검사를 마치고 병원 식당으로 갔다. 3개월에 한 번 외래 진료가 있는 날이면 병원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간단히 먹는 한 끼 식사가 뭐라고 메뉴가 무척 궁금하다. 식당으로 내려와 점심 차림표를 확인하고 들뜬 마음으로 자리를 잡았다.     


식판에 음식을 담고 자리에 앉았다. 국은 맑은 소고기 떡국이다. 김치는 배추김치. 아직 덜 익은 생김치다. 간장 양념으로 버무려낸 김무침. 독특한 향이 나는 참나물은 밭에서 막 뽑아온 듯 싱싱하다. 잡채는 면이 통통 불고 채소는 코딱지만큼 있었지만, 참기름으로 고소함을 유지해 맛은 제법 괜찮았다. 밥은 수수가 들어가 쫀득쫀득해서 떡을 먹는 느낌이었다. 고기나 생선이 없어도 좋아하는 반찬으로 어우러져 눈이 즐겁고 입은 달았다.       


내가 차린 밥상이 아니라서 그런가? 한결같이 맛있다. ‘으~음!’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집밥에 지친(?) 딸도 오랜만에 외식을 즐기며 기분이 한결 좋아 보인다. 점심을 먹는 시간만큼은 검사 결과는 잊고 밥 먹는 즐거움에 푹 빠졌다. 기분 좋은 식사가 끝나면 양치를 하고 잠시 병원 뒤뜰로 나간다.


푸른색 물감을 칠한 듯한 하늘이 참 곱다. 초록 초록한 나무와 풀을 실컷 눈에 담고, 바람이 살포시 실어다 주는 향긋한 풀향을 삼킨다. 이 순간만큼은 긴장된 마음이 눈 녹듯 사르르 녹는다. 진료 시간이 다가온다. 에휴. 이젠 가야 한다. 유독 오늘은 더 긴장된다.     


오늘 딸이 입을 열기로 했다. 2년 동안 말하지 못했던 중요한 비밀. 깊은숨을 내쉬고 진료실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ㅇㅇㅇ씨 들어가세요. ”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담당 교수님은 우리와 눈을 맞추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셨다. 검사 결과를 확인하시고 모든 결과가 좋다고 말씀하신다. 다만 콜레스테롤 수치가 지난번과 똑같이 높아 약을 먹어야 할 정도라며 염려하신다. 지난 검사에서 LDL 콜레스테롤 수치와 총 콜레스테롤 수치가 많이 오르긴 했었다. 올해 4월 헬스를 시작하면서 단백질 보충을 위해 육류와 찐계란을 꾸준히 먹은 뒤 콜레스테롤 수치가 올랐다.      


교수님은 그동안 먹어 온 약으로 인한 부작용 중 눈에 관련된 질환이 있을 수 있으니 안과 검진을 해보라 하신다. 안과에 제출할 소견서를 작성하시는 교수님을 향해 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교수님...교수님...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용기 냈지만 선뜻 말을 뱉지 못한다.                     


“저...저...약 안 먹은지 좀 됐어요... 한 2년 정도 됐어요. 현재 ㅇㅇㅇ만 먹고 있어요.”                    


교수님 얼굴에 서리가 내린 듯 차갑다. 마스크 때문에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지만 짧게 한마디 하셨다.                

“진짜 돌아버리겠다...(?)”          


3년 전 딸아이 살려달라고 오열했는데, 배신당한 심정이었을 교수님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딸은 약을 먹지 않은 이유를 말씀드렸고, 현재 생활하고 있는 전반적인 내용을 설명했다. 교수님은 순환기내과 약도 먹지 않는지 물었고, 딸은 먹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현재 순환기내과 협진(병원 내 서로 다른 과가 함께 진료)을 하고 있는 상태다. 2019년 입원 당시 폐와 심낭(심장을 싸고 있는 막)에 염증으로 물이 찼고, 한 달 넘게 관을 꽂아 물을 빼내야 했다. 퇴원 후 3개월에 한 번 순환기내과 외래 진료도 받고 있는 중이다.      


교수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는 듯 느껴졌다. 딸이 잘못될 수도 있는데 2년간 아무런 상의 없이 약을 먹지 않았으니 얼마나 답답했을지 공감이 된다. 뒤통수 얻어맞은 듯 한참 모니터를 바라보시며 자판을 두드리셨다. 잠시 후 교수님이 입을 열였다.     


“ㅇㅇㅇ만 처방해 줄게요. 6개월 뒤에 와서 피검사하세요.”     


그 말을 듣고 딸은 속 없이(?) 기뻐했다. (긴 시간 동안 검사를 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 도달했다는 건 병이 많이 호전됐다는 반증으로도 볼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상선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아직 불안정한 상태인데 주기적으로 확인해 봐야 하지 않을까? 염려 또한 되었다. 나는 사실 6개월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버림받은 느낌이 들어 뒤숭숭했지만, 충격이 컸을 교수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화를 낼 만도 한데 교수님은 묵묵히 참아내신다. 하지만 못내 아쉬운 것은 약을 먹지 않고 2년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으셨다. 그동안 약을 줄여줄 수 없는지 몇 차례 요구했으나 3년 전 딸 상태가 심각한 중증이어서 신중하셨던 교수님은 스테로이드와 갑상선 관련 약만 검사 결과에 따라 조절하시고 나머지는 그대로 처방하셨다.      


6개월 뒤에 오라는 말씀 외에는 아무런 피드백도 주시지 않은 교수님을 뒤로하고 진료실을 나와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복잡 미묘한 감정이 뒤엉킨 느낌이다. 힘들었을 텐데 용기 내어 말해준 딸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당당하게 ‘약 먹지 않고 치료해 볼게요.’라는 말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슬프다. 왜 환자는 의사 앞에서 이토록 작아지는지. 우리는 계속 병원을 내원해서 검사를 받고 결과를 확인하며 관리해야 하는 입장이다. 교수님과 불편한 관계가 되고 싶지 않다.      


엉뚱하지만 이럴 땐 내가 딸을 온전히 치료할 수 있는 이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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