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라는 행운

by 이면

D교수님은 독일 친구들이 예측했던 것처럼 약속을 까맣게 잊었다고 했다. 이유는 기존에 있던 자녀들과 최근에 태어난 신생아를 아내와 함께 돌봐야 했기 때문이라고. 매우 정중하게 사과하시며 목요일에 보자고 하셨다.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교수님도 별 일이 없었고, 내게도 여전히 기회가 있었다. 그날의 절망이 정말이지 한풀 꺾이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준비에 들어갔다. 프로포절 내용은 어느 정도 숙지됐지만, 끝까지 나를 붙잡은 건 PPT였다. 특히 두 장의 슬라이드가 마음에 걸렸다. 수정할지, 삭제할지 미팅 직전까지도 망설였다. 결국 자신이 없어 빼려던 그 두 장을 그대로 둔 채 링크에 접속했다.


드디어 미팅이 시작되었다. 미팅은 1시간 30분 동안 이어졌다. 20여 개 PPT 자료 중 슬라이드 2개로 각 30분 넘게 이야기를 했다. 끝까지 고민했던 그 두 장이었다. 한 장은 내 분석이 드러난 부분이었다. 다른 한 장은 향후 어떤 연구를 하고 싶은지 서술한 내용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두 장 모두 내 생각이 기반된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난 내 생각이 자신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교수님을 연구 방향이 다르다고 판단할 수도 있고, 그건 다른 교수님을 또 찾아야 하는 상황을 의미하니 말이다.


한 장은 내가 직접 분석한 내용이었다. 다른 한 장은 앞으로 하고 싶은 연구 계획을 담은 페이지였다. 돌아보니 두 장 모두 ‘내 생각’이 뚜렷이 드러난 부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생각에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혹시 연구 방향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다시 다른 교수님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교수님은 귀신같이 그 부분을 집어내 깊게 논의를 이어갔다. 그리고 연구 계획 페이지에서, 내 국제 비교 연구 주제가 본인 연구와도 맞아떨어진다며 원한다면 함께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첫 번째 미팅에서 합격을 얻어낸 것이다. 미팅 끝자락에 난 뒤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참 다행이었다. 처음번 박사자리가 없다는 메일을 받고도 프로포절을 준비한 것, 교수님이 들어오지 않았단 이유로 내용 보충을 멈추지 않았던 것, 뺄까 말까 고민했던 자료를 넣었던 것 모두 다행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행’이라는 뜻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더’ 아닐까. 그 다행들이 모이고 모여 작은 행운을 만든다. 오지 않을 것만 같은 행운들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온다. 희망을 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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