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지나지 않아 교수님께 답장이 왔다. 추천서를 써주실 수 있다며, 양식과 마감기한을 알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짧은 안부 인사도 덧붙어 있었다. 형식적인 인사였지만, 이상하게 나쁘지 않았다. 형식은 때로 불편할 수 있지만 동시에 울타리처럼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무사히 추천서를 받고 나니 잠시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곧 다른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내 자질을 낮게 평가하지는 않으실까? 아니, 장학금에 불이익이 될 만한 내용을 적지는 않으실까? 돌이켜보면 객관성이 부족한 추론이었다. 제자가 잘되길 바라지 않는 스승이 과연 몇이나 될까.
더구나 석사 지도교수님은 실력으로나 인성으로나 존경할 만한 분이셨다. 내가 좋은 스승을 만났다고 떠올릴 때 늘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분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정말 엉망인 제자였다면, 몇 년 만의 연락에 추천서를 부탁하는 메일에 굳이 답장을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완곡하게 거절하시거나, 혹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겠지. 일단 써주겠다고 하신 이상, 그 형식에 맞게 성실히 작성해 주셨을 것이다. 이처럼 불안은 언제나 객관성을 무시한다. 마치 불안은 헬륨가스 같다. 들이마실 수도 있고, 들이마시면 잠시 동안은 요상한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진짜 내 목소리가 아니기에 금세 사라진다.
돌이켜보면 교수님들 앞에서 내가 가졌던 불안에는 뿌리가 있었다. 겸손과 저자세를 혼동하며 자기 존중감을 낮게 유지했던 습관, 모든 것을 알아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완벽주의적 사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실패불안, 노력보다 타인의 평가를 앞세웠던 외부 인정 의존성, 빨리 앞서가야 한다는 조급함에서 비롯된 성취불안, 그들이 걸어온 지난한 길을 바라보지 못한 인지적 경직성, 무엇보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한 자기비판적 성향. 이 모든 것이 내 불안의 씨앗이었다.
불안은 사실은 외면하고자 할 때 생기는 생각이 것이었다. 불안의 씨앗들은 교수님은 나를 돕고 싶어 한다는 사실, 그럭저럭 잘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 모르는 게 있으면 배우면 된다는 사실을 등지게 했다. 이것들은 실패하기 싫은 상태 아니, 실패할 줄 모르는 상태로 이어졌던 것이었다. 또한 실패할 줄 모른다는 건 곧 나 자신과 타인을 믿을 줄 모른다는 뜻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은 결국 사회적 동물이기에 유대감 없이는 살 수 없다. 이 사회 속에서 ‘나’라는 울타리에 갇히는 순간, 객관성은 쉽게 상실된다. ‘나’를 감각함과 동시에 ‘너’를 인지하고, ‘우리’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내 모습이 ‘우리’ 모습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불안은 더 이상 우리를 잠식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