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아바
나는 그때 어른이 필요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가 너무나도 답답했다. 난 너무나 자기중심적이었다. 마치 나만이 세상의 고민을 다 가지고 사는 것처럼 온전히 나 자신밖에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다. 난 그저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나보다 조금 더 살아 본 사람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그게 인생이든, 일이든, 사랑이든 명쾌한 해답을 내려주는 사람을 원했다.
하지만 그런 어른은 없었다.
선배들은 대부분 자신의 삶에 찌들고 지쳐있었고, 나보다도 심경이 더 복잡해 보였다. 남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어느 날은 예전 회사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잘 지내? 술 한잔 하자."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선배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어른 같았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가만히 듣고 있다가 별일 아니라는 듯 명쾌한 답변을 내려줬다. 사실 나의 걱정은 답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시시했고, 별 것 아닌 일들이 많았으며, 때론 행복한 고민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나에게는 그 사소한 일들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그는 나와는 열 살 넘게 차이가 나는, 그러니까 회사에서는 부장님, 지인으로 치자면 삼촌 정도 되는 그런 세대차를 가지고 있었다. 나이답지 않게 고지식하거나 답답한 면이 없는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선후배로 만났지만, 퇴사 후에 더 친해진 케이스. 나는 고민거리가 생기면 그에게 털어놨다. 물론 그가 모든 답을 내려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신기하게 고민거리가 해결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결국 다른 데 있었다. 유부남이었던 그는 갑자기 나에게 뜬금없이 사랑고백을 해왔다. 편안하게 선후배로 만나며 나 혼자만 좋은 어른이라 착각을 했었던 것이다.
대가 없는 친절은 없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좋은 어른이, 늘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했었나 보다. 그의 고백 이후 더 이상 그와 연락하지 않았다. 그맘때쯤 은퇴 후 반려식물 키우기 콘텐츠에 대한 기획을 하고 있었다. 합정동에 있는 식물가게를 한 곳 섭외해서 촬영을 하고 사장님 인터뷰를 진행했다. 식물가게에는 봄햇살을 맞으며 눈부시게 빛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중 내 눈에 유독 반짝이던 초록색 이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사장님, 이 식물 이름이 뭐예요?"
"구아바예요."
"열매 식물 구아바요?"
"네 맞아요."
갑자기 광고 시엠송이 떠올랐다. '구아바 구아바 망고를 유혹하네~' 음료수 광고였던가. 그저 시엠송만이 입가에 맴돌았다. 구아바는 열대 지역에서 자라는 과일로 그냥 먹어도 좋지만, 주스를 만들어 먹거나 샐러드를 만들어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비타민과 식이섬유와 같은 영양소가 풍부해 항산화 기능도 있다.
"초보자도 쉽게 키울 수 있을까요?"
"네, 어느 환경에서든지 잘 사는 아이라 초보자들도 좋아요."
수형도 너무 예뻤다. 덜컥 집에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구아바는 우리 집 가족이 되었다. 한동안은 회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구아바의 싱그러움과 아름다운 곡선에 빠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식물가게 사장님 이야기처럼 구아바는 초보자의 손에서도 부족함 없이 잘 자라줬다. 겉흙이 마르면 베란다에서 물을 주고, 햇볕을 잔뜩 받게 한 다음 다시 거실로 데리고 들어 왔다.
나는 구아바의 씩씩한 모습이 좋았다.
연약하고 기다란 나뭇가지에 초록의 잎들이 여러 장 매달려 마치 서커스단 단원들이 곡예를 하는 것 같았다. 가지가 얇아서 그 자태는 더 우아했다. 나는 밤마다 구아바를 보며 내 마음을 정리했다. 한 마디 대화도 없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털어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내가 기다렸던 어른을 만난 것 같았다.
구아바가 우리 집에 온 지 벌써 4년 차다.
구아바는 어느새 쑥쑥 자라서 130센티미터나 되는 키를 자랑한다. 식물이 쑥쑥 자라는 동안 나는 더 이상 그 시절과 같은 고민거리는 없어졌다. 나이 먹을수록 더 단순해진다. 걱정은 에너지가 많아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꽃과 열매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지만, 구아바는 꽃도 피고, 열매도 얻을 수 있는 식물이다. 물론 우리 집 구아바는 너무 연약해서 열매까진 어려울 것 같다. 그런 목적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니, 그래도 가끔 화분이 너무 작지는 않은지 걱정이 앞선다. 지금 화분보다 어울리는 화분을 찾을 자신이 없다.
그 시절 흔들리는 나를 껴안아 준 너.
오랫동안 내 곁에 있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