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장포
살다 보면 참 이상한 날이 있다.
누군가가 나를 귀하게 만들어 주는 듯한 느낌.
잡지 촬영을 위해 쿠킹스튜디오로 향하면서 택시를 탔다. 될 수 있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싶었으나 집에서 쿠킹스튜디오까지는 너무나도 애매한 위치라 늦지 않으려 택시를 불렀다.
택시에 타자마자, 기사님은 내게 말을 걸었다.
"ㅇㅇㅇㅇㅇㅇ가 뭐 하는 곳이에요?"
"잡지나 TV 같은데 내보낼 요리 콘텐츠를 연구하고 만드는 곳이에요."
"아, 그런데가 있어요? 난 식당인 줄 알았는데."
기사님은 호기심이 많아 보였다.
그러면서 자신은 너무 행복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제 아내가 요리를 정말 잘해요. 식당에서 먹는 건 이제 입맛에 안 맞아서 못 먹어요. 손님은 요리해 줄 사람 있어요?"
"네, 남편에게 요리를 해주죠. 평일에는 회사 가느라 같이 잘 못 먹고 주로 주말에만 요리해서 먹어요."
기사님은 흠칫 놀라며 내 얼굴을 한번 바라봤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일찍 결혼했어요."
"일찍은 아니고요. 저 나이 많이 먹었어요."
"많아봐야 스물일곱, 서른? 정도겠는데."
"아니에요. 저 마흔도 넘었어요."
"예? 우아 진짜 동안이네."
빈말이든 아니든, 어려 보인다는 말에 기분이 좋은 건 내가 늙었다는 증거다.
평소에는 자꾸 말 거시는 기사님이 불편했는데, 이번 기사님은 상대방의 기분을 즐겁게 해 주시는 분 같았다.
촬영이 끝나고 늘 똑같은 나의 루틴.
스튜디오 건너편에 있는 카페에서 아인슈페너를 마신다. 그곳에 방문할 때마다 아인슈페너를 주문하는데, 맛이 한결같다. 처음 그곳에서 마셨던 아인슈페너의 달콤 쌉쌀함을 잊지 못한다. 늘 같은 것으로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서 커피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남자 직원은 커피를 쟁반에 올려 내 자리까지 가져다주었다. 한 번도 커피를 가져다준 적이 없는데, 늘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고 말하면, 손님이 카운터까지 가서 음료를 받아가는 방식이었다.
"맛있게 드세요."
'커피를 가져다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나 보네'라고 생각하며, 맛있는 첫 모금을 음미했다. 이럴 때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즐거운, 감사하다는 기분이 든다. 몇 분 후 여자 손님이 들어왔다. 그들은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카페라테, 아메리카노 2잔 나왔습니다."
손님은 카운터에서 주문한 음료를 받아 왔다.
'왜 나만 서빙을 해 준 것일까?'
왜인지 모르지만 별것 아닌 일에 기분이 좋았다.
커피숍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가다가 너무 늦는 것 같아서 지하철로 갈아탔다. 미친듯한 폭염 때문인지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이 만리길 같았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버스정류장까지 걷는 길은 또 얼마나 멀게 느껴질까. 요즘 같은 날씨에 대중교통을 몇 차례 갈아타야 한다는 것은 훈련과도 같았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전광판을 바라보니 바로 버스가 온다는 표시가 있었다. '오늘 정말 운이 좋네'라고 생각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버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주머니 한 분과 나만 버스에 앉았다. 기사님은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이거 쌍문동 가는 버스 아닙니다."
아주머니는 답했다.
"알아요. 저는 반대방향으로 갑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감지했지만, 이미 버스는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버스기사 아저씨는 내게 말했다.
"뒤에 있는 손님, 쌍문동 쪽으로 가실 거면 내리셔서 바로 뒤에 오는 같은 번호 버스 타셔야 해요."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기사님께 말했다.
"아, 그런가요? 저 그럼 내려주실 수 있을까요?"
"네, 여기서 세워드릴 테니 바로 뒤에 오는 같은 번호 버스 타세요. 카드 찍지 마시고 앞 버스 잘못 탔다고 말하고 그냥 타면 태워줄 거예요."
"기사님, 감사합니다."
나는 가끔 이렇게 버스나 지하철을 잘못 탄다. 솔직히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정신을 잘 차리는 편이 아니다. 마인드 자체도 '잘못 타면, 내려서 다시 타면 되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기에.
나는 버스에서 내려 다음 버스가 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버스 뒤쪽으로 우리 동네에서 자주 봤던 버스 번호가 보였다. 기사님의 조언을 뒤로하고 나는 다른 버스를 탔다. 청개구리처럼.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버스 노선표를 확인해 보니, 반대로 가는 버스를 탄 것이다. 아, 기사님 말 들을걸. 나 뭐 하고 있는 거지.
할 수 없었다. 최대한 집 가까운 곳에서 내려서 다른 버스를 타는 수밖에. 나는 몇 정거장 안 가서 버스에서 내려 집에 가는 버스 번호를 정확하게 확인했다.
더워도 너무 더운 오후 4시, 버스정류장에서 나는 집에 가는 버스가 오길 기다렸다.
다행히 얼마 되지 않아 버스가 저 멀리서 오고 있는 게 보였다.
버스는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정류장에서도 딱 내 앞에 정확하게 섰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가장 먼저 버스에 올라탔다.
뭔가 많은 것들이 꼬였지만, 기분이 좋았다.
오늘 만나는 사람들은 내게 모두 호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난 참 단순한 사람인 것 같다.
얼마 전 식물가게에 았다가 꽃장포를 데려왔다. 지금은 꽃이 피어있는 모습으로 조그만 몸에서 줄기를 4대나 올렸다. 바람이 불면 하늘하늘 움직이는 자태가 얼마나 유연한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싱그러워지는 느낌이다.
어떤 이에게는 그저 풀에 지나지 않겠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귀한 식물이다.
산과 들에서 볼 수 있는 야생화라서 몸값이 높지도 않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식물은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순둥순둥하게 살아간다. 병충해도 잘 생기지 않는 편이고, 과습에 민감한 편도 아니다. 오히려 물을 자주 주면 좋다고 하니, 나는 이 조그만 아이에게 더 큰 사랑과 손길을 줄 것 같다.
식물이나 사람의 가치는 외형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외형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시대는 지났다. 어떤 화분에 담겨 있는지, 누구의 손에 길러지고 있는지, 또 어떤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꽃장포가 담긴 화분은 정말 오래된 빈티지 화분이라고 식물가게 사장님이 알려줬다.
버스에서 내려 아파트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
나는 아래층에 사는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이사 오셨을 때는 떡도 주시고, 살갑게 인사를 하셨는데, 지금은 마주쳐도 우린 데면데면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오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누르시다니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에게 호의를 보인 사람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사실, 나도 같이 올라가고 싶지 않아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상대도 느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