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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헐적으로 삐끗하기

봄의 기록

by 이븐도




일기를 쓰면 좋은 점이 있다. 작년의 내가 어떻게 고통받았는지, 왜 기뻤는지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작년의 나는 지금처럼 코를 훌쩍거렸고 손에 습진이 생겨 왕왕 커다란 항생제를 먹었다. 2교대 근무 때문에 잠을 항상 모자라게 잤다. 친구들을 자주 집으로 불렀고 하루빨리 파견이 끝나기를 바랐다. 어딘가를 가서 벚꽃을 봤고 싼 향수를 여러 개 샀다. 자주 피곤하고 불행했지만 그래도 또 그만큼 즐거웠다.

아하. 그렇군. 평화는 소중한 것이다.


나는 오늘도 고통스럽다. 작년처럼. 언제나 그랬듯이.

파렉신과 페인엔젤에게 며칠간 큰 신세를 졌고, 앞으로도 질 것에 감사해하고 있었는데 아침에는 초록색 가래가 나왔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세상 모두가 나만큼 만사에 불평을 하고 손톱만큼 아픈 것에도 징징거며 티를 못 내 안달이었다면 어떤 나무와 데이터 공간도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가끔은 병원에 있는 애기들이나 성인들이 본인들이 느끼는 고통과 짜증과 우울과 불안을 모두 어딘가에 써붙여 놓고 스피커로 토로한다면 어떨까 궁금하다. 그들이 느낄 법한 감정이 가늠이 안 된다. 어쩌면 내 생각만큼은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렇다.


호르몬의 등락에 따라 대충 불안한 시기가 도래했다. 이전에는 정체를 알아내려 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딱히 원인이 없다. 나는 똑같이 출근하고 퇴근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낸다. 뭘 더 할 수 있어? 고민하는 시간에 그냥 잠이나 자거나 바깥으로 나가는 게 나았다. 그래도 행동이 더 느려지는 건 사실이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 백팩 하나만큼의 짐과 캐리어 하나 가득 빈 반찬통을 챙겼다.




모든 준비와 꾸물거림을 마친 후 신발장에서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어차피 골백번은 더 있던 일. 내 휴대폰이라면 응당 이 정도는 버텨 줘야 하는데, 하는데?

집어든 화면에서 나는 깎아놓은 손톱 조각만큼이나 작지만 반짝이는 섬광을 보았다. 몇 초 후 액정 아래쪽의 몇 센티미터 전체가 눈이 아플 만큼 번쩍거렸다. 머리가 확 깼다. 30만 원? 진짜 30만 원이네. 이런, 씨






그리고 서비스센터에서는 황송하게도 무료로 교체를 해 주었다. 아마 휴대폰을 산 지 일 년이 안 되어서. 물티슈도 받았다. 앞으로도 충성하겠다고 다짐했다.






걷는 길마다 내 숨소리가 들렸다. 목구멍, 귓구멍, 머릿속이 다 들숨에 날숨이었다. 목련과 벚꽃이 잔뜩 피어 있었고 입안 점막이 모두 깔깔하게 마른 것 같았다. 직장인들은 사원증을 걸고 가디건이나 재킷이나 얇은 패딩을 걸치고서 아아 컵을 들고 사진을 찍고 천천히 걸었다. 정말 봄이구나. 내 30만 원. 30만 원. 서비스센터로 가는 내내 나는 이 30만 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했다. 이어 30만 원이 이 정도의 가치라면 2000만 원은 대체 어느 만큼일지 감히 가늠해보려 했으나 목구멍이 깔깔해서 그 생각은 멈췄다.


기침이 너무 나와서 지하철에 앉아 있는 게 신경이 쓰였다. 생리를 기다리며 다가온 존재의 근원 또는 이유 같은 깊은 사고가 박살 난 액정으로 인해 다 사라져 버렸다. 아, 이렇게 한 번씩 충격을 받아야 평화가 뭔지를 알게 되는구나.

30? 30만 원이라.. 약 2.5 강릉에 2 공연 정도 되는데. 아낀 건가? 아낀 거지. 하하하. 꽃잎이 대충 떨어지는 가볍고 부드러운 바람이 아렸다. 불지 마, 내 목구멍 말라. 아이고야.




병동에서 대체 누가 나에게 이런 아름다운 것을 옮겼는지 범인을 찾아내려 했지만 모두가 켈룩이거나 켁켁거리며 일하고 있어서 알 수 없었다. 느낌상 코로나 같긴 했으나 나는 작년에도 결국 그 어떤 유의미한 -병가를 받을 수 있는- 질환도 아니었던 것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썼기 때문에 그냥 약국으로 갔다. 최대한 버틸 것이다. 다시 한번 쎄파렉신과 페인엔젤께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내 면역력과 호흡기계가 잠시 삐끗했던 것과 달리 동기는 약 1년 전쯤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복층에서 내려오다 진짜로 발목을 접질렀다. 그리고 또다시 접러서 며칠간의 병가를 받았다. 아픈 사람에게 할 소리는 아닌데, 그녀도 나처럼 소중함을 알았을까 궁금했다.

물론 손톱만큼 고통스러운 나와 달리 좀 많이 고통스럽겠지만. 또 그것도 30만 원의 지출이 사라져서 조금 경감이 되긴 했다만. 그래도 나는 뛸 수는 있잖아.






출근 거의 직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잤다. 며칠 내내 너무 나약해지는 느낌이라 상당히 짜증이 났고 누워 있으면 내 숨소리와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그게 일어나지 못한 것과 딱히 관련은 없지만 어쨌든 꽤 기력이 쇠한 기분이었다. 네 시간? 여섯 시간? 약효가 떨어지면 그 즉시 목구멍과 머리가 아프다.


며칠 전, 한밤중이나 새벽에 외롭게 뛰던 추운 공원에 벚꽃인지도 몰랐던 게 잔뜩 피려 하고, 사람들이 먹을 걸 싸들고 벤치며 잔디에 앉아 있던 게 떠올랐다. 잠시 떠나 있던 동안 약탈당한 기분이었다. 아니, 지금도. 약탈당하고 있다고.

내가 병균에 점령당하는 동안 외부인들이, 같이 뭔가를 먹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을 가진 해적들이 내 멋진 섬을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었다. 아, 나도 끼워 주세요. 세균이냐, 그 해적들이냐. 둘 다는 안 돼. 너무 배알이 꼴려 견딜 수 없었다.




얕은 감기 따위에 모든 걸 다 빼앗길 수는 없다. 나 빼고 저렇게 다 재밌잖아. 이봐, 나는 무려 영하의 온도에서도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오기로 여길 뒤뚱뒤뚱 우스꽝스럽게 달렸다고. 당신들 그때 뭐 했어, 혼자 외롭게 내가 뛸 때 뭐 했냐고. 안 돼, 이 공원의 아름다운 모습만 쏙 즐기려는 아름다운 당신들 안 돼. 내가 가야 해.

나는 그래도.. (어.. 반년밖에 안 됐잖아?) 저쪽의 거대 곰돌이가 앉아 있다가 쓰러지고 치워지고 나뭇잎이 초록과 빨강에서 갈색으로 변하고 아예 없어지는 것까지 봤단 말이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함께했다고. 안돼. 공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내가 이렇게 색다르게 예쁜데 안 보러 올 거야, 하고 낸 텔레파시를 았다.


열두 시 반인지 아홉 시 반인지 모를 만큼 사람이 많았다. 대낮인 것처럼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고 장거리를 이동할 탈것이라곤 택시와 자가용밖에 없을 시간대에 외출복을 입고 설렁설렁 여기저기를 걸어다녔다. 그래, 멋진 연애 해라. 집에는 언제들 가니?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이 다 즐거워 보였다. 열받게도 달리니까 기침이 안 났다. 목이 마르는 건 비슷했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잖아? 주말에 비가 온다고 해서인가, 벚꽃의 최후를 지키려는 많은 이 나도 함께했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었을 때나 테니스 스커트 입던 대학 신입생 때나 머리가 산발이 되어 뛰는 지금이나 항상 똑같고 다르게 졌다.






진짜로 발목을 삐끗한 그녀의 대체자가 없기 때문에 근무 인원이 줄어 오늘 더 많은 환자를 봐야 한다.

부인과 환자들. 망했다.

될 대로 되라지, 나도 날 잘 몰라.

아돈노-


아니, 나도 잘 하고 싶지. 그런데, 아켄텍마브리드, 브리드, 브리드. 자꾸만 내 숨이 막혀 와 내 숨이 예에..

사방이 기침쟁이들이다. 어제의 달리기 후에 돌아오는 횡단보도에 있던 사람도 콜록거렸다.






이 접질림이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공기와 들숨날숨과 더 아름다운 5월과 컴백 후 활동과 더 좋아진 날씨 등등이 있겠지. 이 삐끗거림들마저 소중하다고.. 하고 싶다면 너무 정신 승리일까? 그럼 어떡해, 이렇게라도 해야지.

왜, 어차피 나는 늘 손톱만큼만 아파도 풍선만큼 난리를 쳤다. 그 부풀려놓은 고통을 일기에 적어 놓으면 내년의 내가, 아 작년엔 이런 걸로 또 호들갑을 떨었군,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은, 이 봄에도 나는 좀 고통스럽고 즐겁고 출근하기가 싫다. 물론 내 직장은 소중하지만.


쎄파렉신, 페인엔젤.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

근데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 짜증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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