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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 저편까지 활공하기

이무기로 발붙인 이곳에서

by 이븐도



드래곤 길들이기. 2025


1. 21000원 / 그냥 거기 살고 싶다.
2. 다시 간다.
3. 봐 주세요. 그래야 오래 상영하지.
4. 동행 : 하든말든
5. 2만원 있어여?보세요. 언제 용 타고 바다 날아요.



내게 이걸 볼 수 있는 2만원과 그 정도의 시간이 있음에 감사했다. 딱히 쓸 말이 안 떠오른다. 글이 길어질까 하는 걱정 같은 건 전혀 없다. 그냥 좋은데? 좋다는 말 이상의 걸 할 수가 없는데? 별점? 평가? 그런 거 없다.


쓸 내용이 없어서 좋다. 엔딩 크레딧을 원래 잘 안 보고 나오는데 끝까지 다 봤다. 천 명쯤 될 사람들의 이름들이 누런 종이 위로 지나갔다. 살면서, 이런 영화를 만드는데 내가 기여해서 이름이 올라간다면 정말정말 너무 멋있는 일이겠다, 고 생각했다. 햇빛이 강하고 습하지 않은 바람이 잔뜩 부는 오후다. 건강해야겠다고 느꼈다. 너무 좋아서 한 번 더 보기 무서운 걸 아는가? 그 기분이다.




사실 글 제목은 영화 내용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투슬리스는 이무기가 아니라 짱쎈최강자드래곤이며 히컵은 전에 없던 드래곤 트레이너이자 수의사이자 한 부족 전체와 드래곤 세계 전체를 살려낸 진짜 영웅이기 때문이다. 골골대는 것처럼 나왔지만 엄청 잘생겼고 - 그래서 여주인공 뽀뽀도 그렇게 급속도로 받았나봐- 똑똑하고 남들과 다르게 볼 줄 알고 용맹한 와중에 섬세하기까지 한 올라운더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언더독의 영웅담 같지만 사실 원래부터 잘났던 친구가 각성하고 인정받는 일대기인데.


제목은 개봉하자마자 보고 오려고 대충 써서 붙여 놓은 거였다. 히컵이 주인공이고 드래곤이 투슬리스인 것만 알았고.. 그냥 그런 내용이겠거니 했거든. 근데 내용은 나한테 아무 상관이 없었어. 그렇게 이 아무말 대잔치의 감상에 또 제목을 짜내기가 좀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둔다. 난 이 영화를 보며 아무 생각도 안 할 수 있어서 좋았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안 봐서 내용은 하나도 몰랐다. 제목 그대로일 것 같기도 했고. 드래곤을 길들이는 내용이구나, 하는 거지. 뭐 더 필요해? 나한테는 그 바다, 녹색 숲, 암벽, 하늘 등등의 것들이 예고편의 전부였다. 3월에 백설공주 보러 가서 본 그 티저를 잊지 않았거든. 내가 얼마나 개봉을 기다렸다고. 정작 개봉날에는 울적해서 못 보러갔지만. 어쨌든.


내용이 어떻든 뭐 그게 중요한가. 저런 걸 영화관에서 볼 수 있어, 무려 두 시간이나. 그것도 용 타고 날아다니는 설정이라 어떤 놀이공원에서 할 수 있는 경험보다 더 호화롭고 안전하고 행복할 거라고. 그래서 애니메이션은 찾아보지도 않았다. 볼까 생각했는데, 이 영화 자체를 먼저 잘 보고 싶었다.






대피 안내가 끝나고, 아이맥스 4DX로 할 수 있는 경험은 이런 겁니다 개쩔죠?하고 바람 나오고 의자 덜컹거리는 거에서 이미 좀 설렌 후에는, 사실은 사는 거 자체가 매 순간이 서바이벌이자 목숨 건 챌린지인 그 마을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끔 공연장에서나 했던 생각인데, 그냥 여기서 자고 싶다고 느꼈다.


너네는 열심히 싸워, 나는 여기서 잘게. 아니면 너네 바다 부근에 등대지기 안 구하니. 나 하러 갈래, 하면서. 아마 그게 영화를 보면서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생각이다.






영화를 보면 항상 생각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러려고 본 게 아닌데 뭔가 좀 잘못됐다고 느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뿐인 인생에 다른 걸 좀 추가하고 싶어서 영화를 보고 감상을 남기는 거였는데 시도는 번번이 대실패였다. 가끔은 헷갈리기도 했다. 내가 영화를 본 건가, 두 시간 동안 그 대사, 장면이 끌어낸 내 다른 잡념과 기억을 보고 온 건가.


그런데 남들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딱히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갑다 했다. 어떡하라고, 그런 생각이 드는 걸. 근데 많이 지겨웠다. 사실은. 영화와 별개로.




브런치에 글 올리는 거 좋지. 그런데 뭔가를 쓰려고만 꼭 영화를 보는 건 아닌데 보고 나면 그 영화보다 내가 할 말이 더 많아져 있었다. 내가 맨날 하던 생각을 그렇게 재구성할 거면 시간 들여서 그런 걸 왜 봐. 그래서 늘 이건 좀 아닌데, 생각했다. 아닌 척했지만. 그간 써온 그 감상문 아닌 감상문들은 특히 그래서 좀 남사스럽다.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으니 멈추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오늘 느끼는거지. 아, 그 영화랑 컨텐츠들이 그냥 나한테 그런 것들이었구나, 하고.






울라고 만들어 놓은 장면이 아닌 데서 정말 많이 울었다. 한 일곱 번 운 것 같은데. 뭐든 보면서 이렇게 자주 운 영화는 이게 유일할 것 같다. 나오니 아이섀도가 다 지워져 있었다.


주인공과 투슬리스가 처음으로 서로에게 경계를 풀고 물가에 금을 그어 신호를 교환하는 장면, 낮의 물빛이 반짝거리던 계곡이 그 배경을 연보라색으로 바꾸는 저녁이 될 때까지의 풍광, 왜 꼬리를 생략하고 그리나 했더니 실제로 반틈밖에 없던 그 낯선 괴물의 꼬리, 그걸 혼자 뚝딱뚝딱 만들어서 먹을 거 먼저 주고 그 뒤에서 인공 꼬리를 붙여 주는 장면, 뭘 바라고 해준 게 아니었으나 갑자기 날게 되어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투슬리스와 함께 처음으로 날아다니는 장면, 또 뭐가 있더라. 넓은 바다, 암벽, 바다의 물결과 색깔, 숲으로 비치는 햇빛, 하늘, 불길, 또 바다, 계곡, 이끼.


사실은 그 거대 파충류들과 십대 바이킹들 말고 대자연으로 제작진들이 하고 싶은 거 다 한 것 같은 그 화면들. 중간에는 오로라도 나온다. 그 색에 얼굴이 비치는 것 같은 연출은 좀 그렇긴 했는데. 오로라는 실제로 볼 수는 있는 거니까 상관없다고. 아쉬우면 가서 보면 돼.




하지만, 내가 언제 용 타고서 암벽 사이를 몸 비틀어가면서 날고, 햇빛 비치는 바다를 스치면서 질주하고, 다시 땅으로 처박힐 것처럼 추락하고, 끝이 어디일지도 모르는 하늘을 향해 다시 솟구치듯 날아오를 수 있겠어. 지금의 영화관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경험이잖아.


예전에 겨울 왕국에서 엘사가 궁전을 만드는 장면을 정말 많이 돌려봤는데, 그게 다 엄청난 미적분과 미적분과 미적분과 미적분의 합이라는 얘기를 어디서 읽었다. 머리가 좀 좋았더라면, 이과로 가서 전공을 정하고 그런 그래픽을 배우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다.

십 년도 더 된 일인데 아직도 기억이 나네. 아직도 유효한 생각이다. 이미 좀 틀리긴 했지만. 정말 너무 멋진 일 아냐?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정확한 문자와 언어로, 숫자와 수식으로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환상적인 대상을 재현하는 데 기여하는 거. 너무 멋지다고. 진짜진짜 멋진 일이다.






한창 2000년대 중반에 많이 나왔던 것 같은 영어덜트 기반의 판타지들이 많이 생각났다. 앳된 얼굴의 십대 애들이 나와서 숲을 달리고 동굴 같은 데를 굳이 들어간 다음 다 무너지는 잔해 속에서 친구 구하고, 또 달리고, 하늘을 날기도 하고, 물에 빠지기도 하고, 또 물에 사는 애들한테 구출되기도 하고, 잔뜩 젖은 채로 바다나 하늘을 또 날고.


그런 거 많았던 것 같은데 제목들도 기억이 잘 안 난다. 하나만 생각나네. 스파이더 위크가의 비밀?뭔 내용이었는지는 잊어버렸다. 그 땐 그럴 나이니까 그런 게 재밌는 줄 알았는데, 이 영화랑 배경을 쓰는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내 취향이었구나, 그냥.




머리가 크고 나서 보니, 남들도 다 인생 영화 같은 걸 정해놓고 말하길래 나도 골라놓긴 했었다. 근데 나는 사실 뭐든 좀 재밌게 봐서 셋 중 하나의 자리는 늘 비워놨었다. 언제든 또 바뀔 수 있잖아. 그래서 세 개를 고르라면 소셜 네트워크, 줄리 앤 줄리아, 하고는 빈칸이었다.


상영관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이 영화 정도면 거기 한 번 끼워 줘도 될 것 같다고. 아니면 그냥 카테고리를 따로 빼서 랭킹을 내주는 거지.




영화를 보면서 왜 저기서 저렇게, 저 대사를, 저 배경을? 이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없어야 했다. 근데 이제 알겠네. 소셜 네트워크처럼 편집이 나같은 멍청이는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빡세거나, 특정 주제나 장면이 아예 내 사고체계를 다 부숴버릴 정도로 맘에 들어야 했던 거지.

드래곤 길들이기는 완벽히 후자다. 멋지다, 예쁘다, 행복하다.. 이런 말로 부족해. 좋다? 좋다는 말 말고 뭐 있지. 작년 5월 하이라이트 콘서트 이후로 이렇게 뭔가를 보고 좋았던 게 최초 같다.






왜 나는 해리포터가 하나씩 개봉되던 시기에 영화관을 다닐 수 있는 나이대가 아니었을까. 나니아 연대기는 왜 제작이 중간에 다 망해버려서 더 이상 후속작들이 상영관에 걸리지 않을까. 나는 영화관에서 보고 싶은데.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도 좋아했는데. 그건 아마 절대 영화관에서 볼 일 없겠지.


왜 사람들이 자기 얘기를 우울한 척 끊임없이 늘어놓는 걸 찍은 예술 영화들이 언제부턴가 덜 보고 싶어졌는지, 둘이 마주 보면서 서로 사랑인지 아닌지를 지겹게 저울질하는 영화들이 머리가 아픈 건지 생각했다. 내가 쿨병이라도 걸려서 그런 거라고 결론지었는데.. 그보다는, 그냥 이런 취향이었던 거다. 그리고 이 영화가 그걸 아주 제대로 겨냥했다.


아, 행복했다. 이런 걸 볼 수 있어서.

다른 것들을 제때 못 봤지만, 시대의 최신 기술력으로 만들어낸 이런 경험을 했으니 그럼 딱 된 거지.






내리기 전에 또 보러 갈 거다. 보러 갈지 오늘처럼 온몸 흔들리는 경험을 하고 올 지는 모르겠다. 너무 좋아서 아예 똑같이 보기엔 좀 아쉽기 때문이지. 6월 마지막날 근무 끝나고, 이번에는 밤에 가야 해.

아쉽고도 행복한 점은 그 영화에 나오던 하늘이랑 물이랑 숲이 내 근처에도 있긴 있다는 점이다. 드래곤을 타고 날아다니는 것처럼 환상적인 구도로 바람을 다 느끼며 볼 순 없지만. 그리고 그런 바닷물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요샌 공기가 슬슬 축축해서 냄새도 난다고. 극장에서도 향기까지는 안 나던데? 하지만 현실에는 있지. 수풀 냄새, 민물 냄새. 바람 냄새.



이래서, 건강해야겠다고 느꼈다. 달리기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히컵도 아스트리드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자유로운 기분을 현실에서 느낄 수 있잖아.


건강해야지.

그리고 또 보러 가야지.

아. 행복하다.





+


하나 있다. 글로 쓸 만하게 좋았던 점.

(스포..? 근데 나는 늘 했는걸.. 하지만 스포다)


이건 주인공이 한 명인 판타지 영화니까.. 영웅은 안 죽는다. 근데, 대신 불구가 되었다. 그거 보고도 울었다. 그런데 영화는 내가 울 시간을 안 줬다. 정확히 말하면 그 눈물을 후회할 텀을 안 주더라고. 보통은 그러면 주인공부터 그 다리를 보고 애통해하거나 주변 사람들이 그걸 영광의 흔적이라든지 너는 그게 있어서 더 강하다든지 하는 눈물 식히는 멘트들을 넣던데, 그래서 우는 게 쪽팔려졌는데.. 그런 게 없었다. 역시 생존이 우선 순위인 바이킹 피는 못 속이는지 그 슬픔을 확대해서 보여 주지 않았다.


그리고 현실도 그렇잖아. 뭐라고 의미를 갖다대도 잘린 다리는 다시 자라나지 않고 장애를 가진 채 살아야 한다고. 누가 그걸 그렇게 불쌍하게 바라보는데? 없다. 그런 건.




그리고 어쩌면 그게 이 영화의 완성도를 올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 실상은 그냥 스토리라인 일직선인 영웅담이라 그렇게까지 짜쳐질 구석도 없지만. 요샌 많잖아. 영화면 영화고 책이면 책이지 자꾸 나를 가르치려 하고 같잖은 생각을 그 화면에 꾸역꾸역 넣는 게 얼마나 많은데.


나는 영화와 소설을 보고 싶은 거지 표어의 형상화를 보고 싶은 게 아니거든. 그렇다고 그런 현실을 아예 못 본 것처럼 만들어놓은 걸 보는 기분도 좀 찝찝하긴 하다만.

아니면 그냥 내가 그 자연들에 눈이 멀어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운 걸 수도 있고.




근데, 판단을 왜 해. 오랜만에 안 할 수 있는 걸 봤는데. 이리저리 비틀어서 오히려 그 각도에 같이 목을 비트느라 내가 더 불편해지는 공주 이야기도, 차별이며 혐오며 다 비판하다가 스토리까지 잃어버린 이상한 내용이 아니라서도 좋았다. 제대로 하면야 뭐든 재밌지. 그런데 다 하기가 어디 쉽냐고. 드래곤 길들이기는 그런 집중을 좀 잘 한 영화 같다.


반대로 말하면? 스토리는 정말 별 게 없다. 근데, 그래서 좋았다고. 사운드, 배경, 인물 다 끌어다 써야 하는 컨텐츠는 어차피 피로해지기 쉽다. 다 자극시켜야 하는데 다 말이 많으면 너무 힘들다고. 영화 끝나고 진짜 엔딩 크레딧 전에 실제 풍광인 듯한 영상을 좀 내보내준 걸 보면 아마 제작도 거기 포인트를 좀 맞춰서 한 거 아닐까 싶다.





너네 이런 거 좋아하지? 보면서 행복했지? 여기서 찍었어, 또 봐. 마지막으로 봐. 실컷 봐, 하면서. 물론 내 뇌피셜이다.


아무튼, 나에게 2만원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앞으로도 2만원은 있을 테니 더 다행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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