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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토끼 Aug 26. 2023

잃어버린 나의 산책길

방학과 주말을 제외한 평일 나의 소중한 시간은 아침 산책시간이다. 

아이들이 등교하고 난 9시 이후 가게문을 걸어 잠그고 근처 공원을 한 바퀴 여유롭게 돌면서, 나무며 꽃들을 보고 공원에 있는 운동기구를 이용해 가벼운 운동을 한 후, 공원 정자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과 새소리를 들으며 가볍게 명상을 하는 것이 나의 아침 루틴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가 있다.

산책길 중간쯤에 나무 계단이 나온다. 이 계단을 올라서면 양쪽으로 죽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오솔길이 시작된다.

입구 쪽 나무 두 그루가 살짝 구부러져 마치 양쪽에서 맞닿을 듯 뻗어 있어 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을 이루고 있다.


햇빛 쨍쨍한 날에는 서로 얽힌 나뭇잎 사이를 뚫고 바닥에 여러 가지 햇살무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맑은 날, 비 오는 날, 바람 부는 날....

이 산책길은 많은 하루하루를 나와 함께 해 왔다.

양쪽으로 죽 늘어선 나무사이로 길이 완만한 S자 커브를 그리며 뻗어 있다.

왼쪽으로는 구불구불한 소나무들이 마치 어느 작가의 작품처럼  멋스러운 형태로 자리하고 있고, 밤나무, 상수리나무들이 그 옆을 지켜주고 있다. 가끔 여기서 청설모도 만나고, 후투티를 만나기도 한다.

오른쪽으로는 운동기구 몇 가지가 놓여있고, 그 운동기구 위로 느티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가끔 느티나무 위에서 비둘기 두 마리가 사랑싸움을 하는지 투닥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수컷 한 마리가 가지에 앉아 있는 암컷 비둘기에게 다가서면 암컷 비둘기는 귀찮다는 듯 날개를 퍼덕이며 조금 먼 가지 위로 날아오른다. 수컷 비둘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그 가지로 쫓아간다. 암컷 비둘기는 이번에는 아예 다른 나무를 향해 도망을 가고, 수컷 비둘기 역시 끈질기게 포르르 따라 날아간다.


설마 암수가 바뀐 건 아니겠지? 멋대로 비둘기 한 쌍의 밀당을 가늠해 보며 나는 운동기구 위에서 열심히 다리를 앞뒤로 뻗어보곤 했었다.


그럴 때면 시원한 바람이 스스스 불어와 나뭇잎을 간지럽히고, 내 뺨을 건드리고 가는 곳....


하지만, 요즘 나는 이 산책길을 걸을 수 없다.


8월도 20일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무더운 올여름.

날씨 탓일까?

유난히 흉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것도 사람들이 많은 신림역에서, 서현역에서, 밝은 대낮에 칼부림이 일어났고, 사람들이 다쳤고, 죽었다.

그게 무슨 트리거라도 되었는지, 그 이후 ㅇㅇ역 살인예고가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그러더니, 심지어 며칠 전 한 산책길에서 출근하던 초등학교 여교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들이 심각한 건 불특정 다수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유도 모른 채 당한 묻지 마 범죄였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어도 운이 없으면 언제든 나도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 웬일인지 나는 평소 다니던 산책길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 평화로운 산책길 어디쯤에 이상한 사람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여기는 아파트와 주택가를 끼고 있는 공원이라 평소에 반려견을 동반한 많은 분들이 산책을 하는 곳이다.

전에는 아무도 없는 산책로를 도는 게 너무 즐겁고 신이 났었다.

마치 이 커다란 공원의 주인이 나인 것 같아 내가 산책하는 시간에는 사람이 없기를 바랐었다.


개학을 했지만, 며칠 동안 나는 공원을 눈으로 바라보며 그곳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번주 용기를 내어 가볍게 몸을 풀고 평소처럼 산책길에 나섰다.


그런데, 웬일인지 나무도, 꽃들도 평소의 내가 느끼던 그 모습이 아니었고, 이상하게 뭔가 휑하게 느껴졌다.

이미 내 마음이 안 좋은 사건에 잠식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계속 예전의 기운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나는 산책을 이어 나갔다.

드디어, 내가 가장 사랑하던 그 공간에 도착했다.


역시 이곳은 변함이 없구나 생각하며 걸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이 공간이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두려움을 누르며 평소처럼 운동기구에서 운동을 했다.

그때 한 아주머니가 강아지를 데리고 지나가셨다.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이는 거였다.

아주머니는 지나가셨고, 다시 조용해졌다. 


열심히 운동을 하고 내리막길로 접어 드는 순간, 저쪽 새로 생긴 운동기구 쪽에 한 남자가 배회하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필 그 남자는 피부가 까만 외국인이었는데, 하얀색 운동기구와 너무나 대비되어 공포스러웠다.


태양은 빛나고 있었고, 이 산책로에는 그와 나 이외에 아무도 없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겨우 정신을 부여잡고 천천히 그를 지나쳐 갔다.

만일 소리를 질렀다면 이게 무슨 실례였겠는가!

이성은 그렇게 나를 나무랐지만, 감정은 여전히 그를 의식하며 그 자리를 가능한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겨우 용기를 내었던 나의 산책길이 엉망이 되어 가게로 돌아왔다.


어쩐지 당분간 이제 산책을 못할 것만 같다.

하루의 힐링이자, 위로였으며,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나를 다독였던 유일한 시간이 바로 그 산책시간이었다.


그 보석 같은 시간을 나는 잃어버렸다.


그저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어떤 사건이, 자주 반복되다 보니 그건 언제라도 나에게도 있을 수 있는 공포가 되어 버렸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이건 나 자신의 문제인 걸까?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일까?

그저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없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고 화가 난다.


나는 언제쯤 이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잃어버린 나의 산책로를 언제쯤 찾을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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