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박나무가 있는 풍경

10월 29일

by 감성토끼

가을이면 키 큰 후박나무가 있는 풍경이 생각난다.

그곳에는 가을마다 노란빛이 도는 갈색으로 물든, 잎이 길쭉한 멋진 후박나무가 있었다.

그 후박나무 밑에서 올려다보던 가을 하늘은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후박나무 옆에는 봄이면 귀여운 뾰죽한 하얀 봉우리를 내밀며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목련이 몇 그루 심어져 있었다.

목련은 참 신기한 꽃이었다. 어쩜 그렇게 큰 꽃이 필 수 있는지....


그때 나는 나중에 정원이 있는 집에 산다면 우리 집 마당에는 꼭 목련과 후박나무를 심으리라 생각하곤 했었다. 어느 시인의 시처럼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고 싶었다.

5월이면 희고 빨간 철쭉들이 찬란하게 빛을 뿜었고, 가을이면 내가 사랑하는 후박나무가 연한 갈색이나 짙은 갈색으로 마치 잘 구워진 빵 같은 색으로 물들었던 그곳.

내가 근무하던 연구소였다.

나는 한 회사의 기술연구소에서 근무를 했었다.모두 남직원인 곳에 단, 4명의 여직원이 있는 곳이었다.


12시부터 1시까지가 점심시간이어서 우리는 11시 50분쯤부터 엉덩이가 들썩이곤 했다.

사내 식당이 있어서 그곳까지 가는 거리는 약 3분 정도.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기에 일찍 가서 줄을 서야 한다. 그래서 5분 전이면 출발을 하곤 했었다.

반찬이 있는 식판에 숟가락 젓가락을 세팅하고 나서 밥을 원하는 만큼 담고, 국이 담겨있는 국그릇을 식판에 올려놓았다.


우리는 식판을 들고 테이블 한쪽에 앉아 밥을 후다닥 먹고 - 이때 음식을 빨리 먹는 나의 습관이 형성되었다 - 남직원들의 족구를 구경하거나 느긋하게 휴식을 취했다.

어느 날, 후박나무가 노릇노릇하게 가을을 내뿜던 날이었다.



내가 족구 심판을 보고 있었는데, 그만 족구 공이 나를 향해 날아왔고, 텅 소리와 함께 내 머리에 공이 꽂히고 말았다. 그날 나는 별을 본다는 게 어떤 건지를 알게 되었다.

정말 눈앞에 별 몇 개가 번쩍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기절까지는 아니었지만, 잠깐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람들이 놀라 달려왔고, 나는 누워서 쉴 수 있는 전화 교환실로 갔다.


연구소 1층에는 전화교환원 언니 둘이 근무를 하고 있는 전화 교환실이 있었다.

여직원들은 가끔 그곳에 놀러 가곤 했는데 교환실 한쪽 구석에 누울 수 있는 침상이 있고, 따끈한 전기장판이 깔려 있었다. 당시의 교환실에는 큰 장비 같은 기기가 있어 헤드셋을 머리에 쓴 교환원 언니가 대표번호로 전화가 오면 원하는 부서로 그 전화를 연결해 주었다. 작동법을 배워서 나도 가끔 전화를 연결해 준 적도 있었다.


그곳에서 누워 쉬고 있었는데, 누군가 남자 직원이 - 아마 공을 찬 직원이지 않았을까 싶다- 우황청심환을 사들고 와서 그걸 먹고 잠시 쉬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여직원들은 결혼과 함께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사규에는 어찌 되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여직원이 기혼인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전화 교환실 큰언니에게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언니는 결혼을 한 기혼자였던 거였다.

결혼을 하게 되면 그만두어야 했기에 회사 측에는 비밀리에 결혼을 하고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채 직장 생활을 계속했던 거였다.


절대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은 부담감이 있었지만, 참 열심히 사는 언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곳에서 나는 결혼 전까지 근무를 하고 결혼하면서 퇴사를 했다.

그 언니가 얼마나 더 근무를 했을는지 궁금하다. 언니의 비밀은 잘 지켜졌을까?


그리고 교환실의 작은 언니는 여수 남자와 결혼을 해서 여수로 이사를 갔다.

차분하고 참한 교환실 작은 언니가 결혼한 그해 여름, 나는 눈치도 없이 그들의 신혼집으로 여름휴가를 가게 되었다.


상남자 스타일의 형부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회를 직접 떠주기도 하고, 언니 부부는 서울에서 내려온 귀찮은 손님을 위해 여수 곳곳을 관광시켜 주기도 했다. 그 신혼집에서 나는 2박 3일 여름휴가를 지내다 왔다.




이곳 평택에서 산책을 하다가 후박나무랑 엄청 닮은 나무를 만났다.

스마트렌즈를 통해 알아보니 칠엽수라고 하는데, 후박나무와 닮은 그 나무를 보는 순간, 먼 시간을 돌아 한창나이 때의 연구소 마당 후박나무가 저절로 떠올랐다.이상하게 목련을 보고는 그 시절의 기억이 없었는데, 왜 후박나무와 닮은 칠엽수를 보고 그때의 기억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아마 난생처음 직접 별을 접했던 강렬한 추억 때문일까?


SE-49faf634-5046-11ed-acf2-31f8bb339a21.jpg 칠엽수


갑자기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의 20대 직장 생활의 기억들이 회오리처럼 밀려온다.

한 달 동안 점심으로 김밥을 먹어야 했던 사연, 잠실야구장에 직장 동료들과 처음 가서 야구경기를 직관한 순간, 오후 네시가 되면 슬쩍 외출을 해서 라면을 먹고 시치미를 떼고 들어왔던 일들.... 주말이면 배낭을 메고 등산을 떠났던 그때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후박 나무라는 단어만 들어도, 어느새 나는 이십 대의 내가 되어 지금은 자취조차 찾을 수 없는 그 연구소의 갈색 후박나무 밑에 서 있다.

나에게 후박나무는 아련하고 그리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으로 안내하는 비밀 암호인지도 모르겠다.




ps. 이번 포스팅을 하면서 후박나무를 찾다가 뭔가 내가 알고 있는 나무와 달라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내가 후박나무로 알고 있던 나무의 정식 명칭은 <일본목련나무>였다. 이럴 수가!!


진짜 후박나무


중부 이북지방에서는 흔히 일본목련나무를 후박 나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일본목련을 조경업자들이 일본에서 수입해 오며 잘못 붙여진 이름이 아직도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이므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불러야 하겠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본목련이 일본에서는 후박이라는 한자로 쓰인다고 한다. 그때 나무에 걸린 이름표에 후박 나무라고 되어 있어 지금까지 나는 후박나무로 알고 있었는데, 후박나무가 아니었다니!!

내 추억의 후박나무가 잘못된 이름이었다니~~~


참 재미있기도 하고, 뭔가 허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어찌 이거 하나뿐이랴!

그래도 내 추억은 일본목련나무가 아닌 후박 나무라는 단어에 반응을 하지 않을까 싶다.



<블로그 댓글 중>


- 20대 추억을 소환해주는 나무를 만나셨네요^^

노랗게 물든 잎에 여러 기억들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아요.

그 이름이 일본목련나무였군요!!

- 감토님글을 읽으니 결혼전 살던 친정집 정원의 후박나무가 생각나네요.

그땐 아파트가 아닌 주택이 싫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가 그립네요.

- 후박나무 이름이 정감이가네요~~

젊은 시절이 담긴 갈색빛 후박나무...마치 젊은 시절과 닮은 느낌이에요.

첫 직장에서의 아련한 추억이 가장 많은 것 같아요.

순수함에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그 시절~~

즐겁게 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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