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오 Jun 14. 2019

나는 내가 참 별로다

나의 이야기: 나만의 비밀

요새는 커피를 세 잔은 마셔야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 같다. 


새벽 2시. 이제 좀 자야겠다. 

노트북도 불도 껐다.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는다. 한참을 뒤척이다 눈을 뜨니 새하얀 페인트가 발라진 천장이 보인다. 

눈을 꿈벅거리다가 문득 의심이 들었다.

'내가 정말 나일까? 진짜 나는 한국에서 가족들이랑 있는 거 아닐까? 여기 있는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가짜 놈 아닐까?'

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새벽 4시다. 

아... 이럴 줄 알았다. 


테레사도 불면증이란다. 

근육이완제 한알을 쪼개서 반개를 먹으면 30분 후에 바로 잠든다고 한다. 

오늘 밤 시험해 봐야겠다. 


테레사 말이 맞았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다. 몸이 축축 늘어진다. 

중력이 온 힘을 다해 나를 잡아당긴다. 


금요일 저녁, 친구 문자다. 

지난달 술에 취해 사서 킵해놓은 오픈하지도 않은 사케가 있다며 마시러 가자고. 

'야근 중이야. 늦지 않으면 갈게.' 

지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 답장을 보낸다. 

그들도 알 것이다, 내가 오지 않을 것이란 걸. 한두 번도 아니고. 

그래도 내 마음 쓸쓸하지 않게 문자를 보낸다. 

'그럼 출발할 때 연락해.'


토요일 아침, 또 두통이다. 이마에 손을 대보니 미열이 느껴진다.  

두통 때문에 눈이 아프고 피곤하다. 오늘도 일하기는 글렀다.


일요일 아침, 어제 약 먹고 쉬었더니 좀 나아진 것 같다. 

첫 버스가 12시에나 올 테다. 

오늘도 걸어가야겠다, 사무실로. 


가만히 일하다가도,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도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누가 심장을 꽉 쥐어짜는 것 같은 통증이 전해진다. 

통증이 점점 잦아진다. 


병원에라도 가야 할까? 

하! 내가 그럴 시간은 있나?





회사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시간이다. 

‘저들은 사람이 아니야. 돌이고 나무야. 돌에 걸려 넘어졌다고 돌한테 화낼 거야? 나뭇가지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고 나무한테 화낼 거야? 아니잖아.’


"휴우..."

그렇게 듣기 싫었던 한숨소리.

중간중간 한숨이라도 쉬지 않으면 숨이 안 쉬어질 것 같다. 

막상 한숨을 쉬고 나면 심장이 아프다, 숨을 내쉴 때 심장에 꽂힌 화살 두 개가 더 깊숙이 박혀 들어가는 것처럼. 


밤이다.

홀로 걸어가는 어두운 길, 집에 엄마가 있으면 좋겠다. 

김치찌개를 맛있게 끓여놓고 세수하고 나온 나에게 따뜻한 밥을 내어줄. 


오늘도 캄캄한 방문을 연다.

노트북을 켜고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는다. 

배고프다. 라면이나 먹어야지.

아, 집에 먹을 게 아무것도 없는 걸 깜박했다.  

물이나 마셔야겠다. 


새벽 1시, 아직 노트북을 끌 수 없다. 

미국 본사 워크숍이 아직 1시간 남았다. 

잠시 눈을 붙여야지.


눈을 떠보니 너무 환하다.

어제도 불도 안 끄고 노트북도 안 끄고 깜박 잠들었나 보다.


세수를 하며 뉴스를 켜놓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공간은 너무 적막하다. 

미국에서 사고가 있었단다.

왜 나는 저기에 없었을까? 내가 저기에 있었어야 하는데...


꿀단지에 빠진 개미처럼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칠수록 침전한다.

차라리 이 침전이 끝나버리면 끝인 줄이라도 알지, 끝은 언제인지 알 수도 없고 조금씩 조금씩 가라앉기만 한다. 


거울 속 내가 낯설다.

이 눈은 죽은 자의 눈, 산 사람의 눈이 아니다.

난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사망 선고를 받았던 모양이다.


다시 출근이다.





"왜 한번 말하면 못 알아듣는 거야? 그래, 많이 봐줘서 두 번까지는 오케이. 그래도 세 번, 네 번, 할 때마다 물어보는 건 아니잖아!"

"넌 기대치가 너무 높아."

날씨가 맑아서 오랜만에 사브리나와 점심 먹으러 시티에 나왔다. 

나는 또 불평을 한가득 늘어놓는다, 푸른 하늘 아래 파랗게 빛나는 바다가 보이는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그 아름다운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 짜증 나."

"왜? 또 뭔데?"

"볼드모트! 지만 잘났지! 우리가 뭐 자기네 팀 일만 하는 줄 아나!"

매일 점심, 킴과 나는 밥을 몸속에 집어넣는 동시에 분노를 뱉어낸다. 

내가 방금 먹어치운 점심이 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또 데이터 분석 부장과 회의다. 특유의 거만한 말투로 자기 팀 프로젝트가 왜 그렇게 오래 걸려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또 긁는다. 15분이면 끝날 회의를 언제나 1시간으로 늘어뜨리는 (할 일이 없나?), 거만하게 상대를 무시하는 그가 언제나 거슬렸다. 이번엔 한마디 했다, 다른 부장들도 있었는데. 

"우리는 너처럼 똑똑하지 않아서 그런가 보네."


"아, 진짜! 이 정도는 좀 알아서 하지. 가뜩이나 할 일도 많은데... 하나하나 다 봐줘야 해!"

팀원이 개발한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해달라며 일요일 하루 종일 메신저를 보낸다. 

확인하고 스카이프로 수정할 점 의논. 다시 수정하고 메시지. 다시 확인하고 스카이프 미팅.

무한반복이다. 

아무리 최애 하는 팀원이라도 이건 너무한다. 혹시나 짜증이 스며들지 않는지 목소리를 차분하게 누른다. 

스카이프 콜을 끊자마자 혼잣말로 화를 푼다. 




12시가 넘었다. 

버스도 트레인도 끊겼다. 

집까지 걸어가야겠다. 


그나마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

귀갓길 밤 산책.


고개를 들면 밤하늘에 별이 많이도 박혀있다. 

고요하다.

산들바람에 나뭇잎들이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귀뚜라미가 귀뚤귀뚤 조용히 소리를 더한다.

밤이 이렇게 아름답다. 

이 곳에 아름답지 않은 존재는 나뿐이다. 


나는 내가 참 별로다. 



이전 24화 생태계 파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