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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화일 Oct 02. 2024

바다 건너에서 가족을 보내는 법

할아버지의 부고장

평소에 글을 미리 써 두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 글은 완성하기를 미뤄왔던 글이다.

지난 시간을 반추하면서 그 때의 감정과 후회를 다시 마주하기가 겁났고, 고작 하나의 글 안에서 그 많은 기억과 당신을 기리는 마음을 내가 온전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앞에만 서면 언제나 바르게 보이고 싶었던 마음처럼, 당신과기억을 담은 문장이라면 하나라도 빠짐이 없이 빼곡하게 모아 반질하게 윤을 내어 드려야 같은 마음.


하지만 어차피 완전히 해내지 못할 것을 안다. 기억과 감정은 비 오는 날 같아서 안개처럼 더듬을수록 많은 것들이 생각나다가도 한순간에 어렴풋해지고 눅눅하게 가라앉은 마음은 진흙 속 웅덩이처럼 팔수록 거칠어진다.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천년만년 사실 것 같았던 분이 돌아가셨단다.

당장 가장 빠른 비행기 표를 끊어도 입관조차 지킬 수 없는 거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데서 오는 무력감은 바로 이런 걸 얘기하는 것일지.

무엇을 위해 여기에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다시금 곱씹혔다.

이미 가신 분인데 어차피 시간도 못 맞출 것을 뭣하러 오겠냐는 위로를 듣더라도 함께하지 못한다는 갑갑함은 온몸에 사무친다.


하루종일 지나간 생각만 하다보니 일상의 사소한 계기에도 불쑥불쑥 할아버지의 기억이 떠올랐다.

잊은 줄만 알았던 기억이 아직 살아있는 추억임에 감사하다가도 언제 다시 바래질까 아까웠던 순간들이 있었다. 나는 이렇게 불안하고 서글픈데 이곳에서 나를 제외한 모든 일상은 마치 먼 나라 이야기따위 아무 상관없다는 듯 돌아간다.

여기에는 내 슬픔을 나눌 사람도, 이해해 줄 사람도 없다.


꺼지지 않을 것 같은 슬픔은 간사하게도 며칠이 지나면서 서서히 걷힌다.

상실로 인했던 아픔은 지금 가장 힘들 가족 곁에 있어주지 못한다는 안타까움과 뒤섞이고 한바탕 슬픔이 차올랐던 자리는 대신 답답함으로 꽉 막히기 시작한다.

이번 생신 때는 전화를 드렸던가? 새해에는? 고작 시차가 뭐라고 연락을 그렇게나 드렸을까 하는 후회가 끝이 없다. 이제는 보고 싶어도 듣고 싶어도 함께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이 현실을 옥죄이는 시간이다.

지난날 우스개소리로 쓸데없는 것 하지 말고 빨리 돌아오라 하시던 그 말씀이 임종도 못 지킬 못난 손자인 것을 예견하신 말씀이었을지.



딴딴한 노인이시기에 가르침이 많았다. 아직 듣고 싶은 말씀도 많았다.

생전에 그 긴 시간 평생을 아우른 경험을 좀더 들을 수 있었다면, 들으려 노력했다면 좋았을텐데 매번 하는 회한은 같기만 하다.

할머니를 보내면서 모든 순간을 소중히 하리라 이미 했던 다짐이 부질없었다. 이렇게나 어리석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 소홀해진다.

똑똑한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데 할아버지는 내가 바보란 사실이 더 못마땅해 하셨을까 당신 장례 때 한국에 가지 못한 것을 더 못마땅해 하셨을까.

아마 둘 다겠지.

통화 후 어쩐지 마음이 내내 뒤숭숭하더라니. 꿈에도 한번 안 나오시고 가셨다.



날짜도 어떻게 할아버지스럽게 맞춰서 가셨느냐고.

딴딴하지만 이따금 농담을 하시던 생전 모습을 흉내내 보려고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장례식 얼마 후 사촌이 생전 할아버지와 찍었던 사진들을 정리했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자주 할아버지댁 방문을 계기로 만났던 사촌끼리의 관계가 이제는 좀 소원해지지 않겠냐는 얘기가 나왔다.

아마 이제 우리가 만나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할아버지가 제일 못마땅해 하실 일이 아닐까.


다시는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답답하다.

이제는 고향에 가도 더 이상 할아버지의 큰 집을 방문할 수도 없다.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은 매주 일요일이나 명절에 할아버지의 부재를 진하게 느낄 것이다.

아마도 이 광경을 어디선가 보시고 계신다면, 내심 흐뭇해 하실 것이다.

그래서 이 상실을, 존재만으로 기둥이셨던 당신이 채우고 계셨던 이 커다란 구멍을 아주 천천히 메우려 한다.


딴딴하지만 이따금 농담을 하시고 재밌는 어르신이었던 할아버지가 어디선가 보고 듣고 있으실 수 있으니.

가능한 한 천천히, 곱씹으면서 오랫동안 보내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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