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그룹 회장실 – 밤 11시]
성찬은 조용히 시계를 바라보았다.
밤 11시 47분.
방 안엔 오직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과 그 위로 깜빡이는 알림창만이 고요를 깼다.
[이사회 정기보고서 제출 완료]
[임시 안건 통과 – 회장 권한 단독 시행: ‘타임캡슐 보존정책 전면 재검토’]
그는 눈을 감고,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원했던 자리야.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지.’
하지만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두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강시후, 정하윤.
“...날 믿진 않았지.”
그가 힘없이 웃었다.
그러나 바로 그 미소 뒤로, 끝내 말하지 않은 고백이 숨겨져 있었다.
진짜 타임캡슐 복원 기록.
조작된 메시지.
상무의 실각을 유도한 정보 유출.
그 모든 퍼즐을 손에 쥐고 있던 건,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는 알아차렸다.
이사회가 끝난 뒤, 시후와 하윤이 자신을 향한 시선을.
더 이상 감탄도 아니고, 의심도 아닌—망설임과 거리감이었다는 걸.
“내가 그들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나.”
성찬은 몸을 일으켰다.
책상 서랍을 열어, 오래된 하나의 메모리 카드 하나를 꺼냈다.
‘ZETA-7 / 마지막 캡슐’
본래 회장만 접근할 수 있는 최상위 등급 데이터였다.
성찬은 그것조차 회장의 권한으로 손에 넣은 상태였다.
그 순간, 알림이 하나 더 떴다.
[접속 감지 – 백업 서버 C-2 / 사용자: K.SIHOO]
[권한: 비인가 접근 / 접속 제한까지 D-2시간]
“…시후 형.”
성찬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분명 멈추지 않겠지. 의심을 멈출 사람이 아니니까.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내가 형들을… 실망시킨 걸까? 아니면,
그들이 아직… 나를 이해하지 못한 걸까.”
그는 답을 알지 못했다.
그저, 커피잔을 들어올리며 혼잣말처럼 중얼였다.
“그래도 좋지 않아?
형들이 이 판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걸 내가 얼마나 바랐는데.”
그 말엔 독기 대신 진심이 실려 있었다.
그는 강박적으로 움직이고, 치밀하게 계획하며
누군가의 검증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 강시후의 사무실]
시후는 복원된 코드 조각을 확대해 들여다보고 있었다.
곁에는 하윤이 조용히 서 있었다.
“이 코드… 성찬이 남긴 조각과 비슷해. 근데, 완전히 같지는 않아.”
하윤은 낮게 말했다.
“그럼, 이건… 누군가 함께 작업했던 기록일 수도 있어.”
시후는 고개를 들었다.
“정지윤 선배와…?”
“혹은—성찬조차 몰랐던, 그 위의 누군가.”
서로의 시선이 맞닿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느꼈다.
이 승리는 너무 매끄러웠다.
그리고 그만큼... 수상했다.
[회장 전용 휴게실 – 새벽 1시 10분]
모든 회의가 끝나고, 문이 닫힌 밤의 사무실.
성찬은 정장을 풀어헤친 채,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천장에는 어릴 적 그가 그린 별자리 무늬의 작은 전등이 매달려 있었다.
서울 본사로 올라올 때, 어린 성찬을 위해 회장이 준비해줬던 유일한 장식품.
그 불빛 아래, 그는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펼쳤다.
‘강시후 형에게’
아직 깨진 글씨로 쓴, 오래전 편지였다.
시후 형,
형이 나한테 웃어줬을 때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가 내 편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형이 내 형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성찬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다시 태블릿을 들어 시후와 하윤의 접근 로그를 확인했다.
예상대로였다. 그들은 점점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조용히 흘렀다.
“형들아… 제발, 이걸 넘어서 줘.”
말끝이 떨렸다.
승자의 자리에 오른 그였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시험받고 싶은 아이'가 있었다.
[회상 – 수년 전, 회장과의 첫 독대]
회장의 서재, 나지막한 조명 아래 성찬은 긴장한 채 서 있었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장학생 자격으로 본사를 방문했었다.
회장은 성찬에게 조용히 말했다.
“너는 머리가 좋다. 계산도 빠르고, 타이밍도 안다.
그런데 잊지 말아라. 진짜 회장은 시스템 위에 서는 자가 아니다.”
성찬은 눈을 들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다. 그게 진짜 권위야.”
성찬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그는 ‘사람의 마음’을 설계하려 했다.
관계, 감정, 충성심, 의심—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변수로 바꾸며.
[현재 – 회장실, 다시]
알람이 떴다.
[캡슐 해제 키 입력 요청 – ZETA-7]
[관리자: 회장 / 대기 시간: 48시간 남음]
성찬은 숨을 들이켰다.
이건 마지막 키였다. 정지윤의 진짜 타임캡슐.
그는 이걸 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손이 떨렸다.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모든 걸 얻었는데… 왜 이게 기쁘지 않지?”
그리고 또 하나의 알림이 떴다.
[강시후 – 재접속 시도 감지됨]
[경고: 비인가 접근 우회 로그 추적 중]
그는 화면을 꺼버렸다.
[내면 독백]
이건 게임이었다.
그는 판을 만들고, 조각을 움직였고, 감정을 계산했다.
하지만… 단 하나의 변수.
‘사람’은 변수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하는 건, 시후와 하윤이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진심으로 실망할까 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의도’마저 오해받을까 봐.
그는 창밖을 바라봤다.
벚꽃이 흩날리던, 그 오래전 봄날의 아침처럼.
그때도 그는 사과 하나를 들고, 누군가를 믿고 싶어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믿음이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STAR그룹 본사 – 옛 지하 보안 서버실 / 오후 11시 50분]
“여기야.”
강시후는 숨을 고르며 낡은 도어락에 관리자 키카드를 대었다.
‘퇴사자 신분’으로 들어온 건 아니었다. 그는 며칠 전, 임시 프로젝트 협력이라는 명분으로 특별 출입 권한을 복원받았다. 물론, 요청자는 회장이었다.
문이 열렸다.
그 안은 마치 시간 속에 갇힌 공간 같았다.
녹슨 서버랙, 끊긴 통신선, 반쯤 꺼진 모니터.
그러나 시후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공간은 성찬이 일부러 남겨둔 ‘길’이었다.
그는 태블릿을 연결하고, 비인가 백업 로그에 접근했다.
화면에 뜬 메시지는 이랬다.
[임시 로그: jiY00N_033CAP-RAWBACK]
[복원 가능성: 21.8%]
[암호화 파편 감지 – 우선 복구 시도할까요?]
“…그래, 시작해.”
시후는 숨을 삼켰다.
이게 성찬이 자신에게 던진 마지막 미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알아야 했다.
복원은 느렸다. 화면이 조용히 스캔을 거듭하며 번쩍였다.
그리고, 영상의 파편 하나가 재생됐다.
[캡슐 영상 – 4년 전 정지윤의 메시지 일부]
정지윤은 병실 같아 보이는 어딘가에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건 내 마지막 기록일지도 몰라요.
만약 이 영상이 누군가에게 도달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내가 믿을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일 거라고 믿고…”
“나는… 타임캡슐 시스템이 사람의 기억을 담는 그릇이 아닌,
누군가의 권력을 지키는 도구가 될까봐 두려웠어요.”
영상이 끊겼다.
신호는 멈췄고, 이어지는 파편은 손상되어 있었지만…
그 한마디가, 시후의 가슴을 꿰뚫었다.
[현재 – 서버실, 시후의 내면]
그는 천천히 태블릿을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성찬아… 이걸 왜 나한테 남겼을까.”
진짜 조작자는 성찬이었다.
이것도 그가 선택적으로 복원 가능하게 남긴 것이었다.
하지만 시후는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오만이 아니라—‘부탁’이었다.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다는,
하지만 직접 말하지 못하는 사람만이 남기는 침묵의 신호.
[회상 – 어린 시절, 형이라 부르던 소년의 얼굴]
“형, 이거요.”
“우와, 사과네. 고마워.”
강시후는 그때를 기억했다.
작고 붉은 사과를 들고 손을 떨던 아이.
세상에 처음 마음을 건네던 표정.
그리고 지금.
그 소년은 수많은 가면을 쓰고 ‘회장’이 되었다.
하지만, 눈빛 하나는…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내면 독백 – 시후]
시스템을 만든 사람은 신이 아니다.
그리고 조작을 했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악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진짜 중요한 건…
그 조작에 담긴 마음이 무엇이었는가.
[마지막 장면 – 하윤과의 통화]
정하윤:
“복원했어?”
시후:
“…응. 그리고 알겠어. 성찬은 우리에게… 믿음을 시험한 거야.”
정하윤:
“믿음을?”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그 시험에 우리가 답할 차례야.”
[STAR그룹 본사 – AI센터 회의실 / 다음 날 오후 2시]
“이 로그, 복호화가 끝났어.”
정하윤은 커다란 화면에 복원된 타임캡슐 로그를 띄웠다.
옆에 앉은 강시후가 그 내용을 빠르게 스캔했다.
[캡슐 식별코드: JIYOON-J_034]
[원본 메시지 상태: 부분 복구 / 암호화 해제 완료]
[전송 날짜: 2021.5.18 / 수신 대상: 미래 수신자 임의 설정]
메시지 본문:
“시후, 하윤. 당신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깁니다…”
둘은 동시에 숨을 멈췄다.
그 이름. 지윤은 4년 전 이 메시지를… 그들에게 남긴 것이었다.
[타임캡슐 영상 재생 – 정지윤의 육성]
“이 캡슐을 보는 당신은, 내가 믿었던 사람일 거라 생각해요.
나의 실종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면… 그 진실을 파헤쳐주세요.”
“그리고 기억해줘요. 시간은 도구일 뿐, 해답은 늘… 지금, 여기에 있어요.”
[현재 – 회의실 내부]
정하윤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형광등 아래, 정지윤의 마지막 목소리가 가슴을 찔렀다.
“이건… 우리 둘에게 남긴 메시지였어.”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성찬은… 그걸 알면서도, 우리에게 맡긴 거고.”
“시험처럼?”
“아니, 유언처럼. 우리가 진짜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그가 믿은 거야.”
[회장실 – 같은 시각 / 성찬의 독백]
모든 영상과 로그가 열람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성찬은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을 껐다.
하지만 그 손끝은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
“시후 형, 하윤 선배…”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누군가의 조카였고, 누군가의 후계자였지만…
누군가의 동료였던 적은 없었지.”
그가 꺼내든 낡은 메모지.
‘처음으로 사과를 준 날’이라고 적힌 날짜 옆엔, 어린 글씨로 이렇게 써 있었다.
형이면 좋겠어.
“…그 바람이, 아직 내 안에 남아 있었을 줄은 몰랐네.”
[그날 밤 – 옥상 / 세 사람의 재회]
성찬은 옥상 위, 별이 흐른 하늘 아래 둘을 마주했다.
“시후 형, 정하윤 선배. 고마워요.”
정하윤은 날카롭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는 뭘 하겠다는 거야?”
성찬은 담담히 웃었다.
“마지막 캡슐. 그걸 열어야 해요. 평행우주, 더 깊은 진실… 다 그 안에 있어요.”
시후가 조용히 물었다.
“그걸 왜 우리랑 열고 싶어?”
성찬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제는, 동료가 필요하니까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윤이 먼저 입꼬리를 올렸다.
“웃기지 마. 그런데… 좋아. 같이 열자.”
시후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음엔… 우리 셋이 같이 움직이자.”
타임캡슐의 마지막 수신지가 드러난다.
그곳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였다.
시후, 하윤, 성찬.
세 사람은 운명을 건 마지막 캡슐을 열기 위해,
미지의 차원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