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 명확하게 말해줘야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 명확하게 말해줘야 선택할 수 있어요.”
[STAR그룹 회장실 – 오후 6시]
정하윤은 퇴근 직전, 비서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하윤 연구원, 회장님께서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지금 회장실로 와주시겠어요?"
‘회장’이라는 단어가 아직 낯설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인턴이던 성찬이, 지금은 정장을 입고 STAR그룹의 회장실에서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그가 어떤 이유로 자신을 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하윤이 문을 열자, 고요한 회장실 안에 성찬이 홀로 창가에 서 있었다.
“왔군요.”
그는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예전의 수줍고 조용한 인턴의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앉으시죠.”
하윤은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성찬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하윤 선배, 이번 이사회에 참석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사회 요?”
“공식적으로는 신규 전략실 멤버로 발탁 제안이 올라갈 거예요. 명분은 충분하죠. 프로젝트 성과, 내부 기여도, 그리고 미래 비전. 결정은 이사회에서 내려질 겁니다.”
“회장인 네가 밀면, 통과될 거란 말이네.”
“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자리에 당신이 어떤 얼굴로 서느냐입니다.”
“…무슨 뜻이야?”
성찬은 마치 오래 준비한 대사를 읊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 STAR그룹은 겉으론 안정돼 보이지만, 내부는 구조조정과 투자 개편으로 어지럽습니다. 저는 새로운 체계를 만들고 있어요. 그 안에,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하윤은 조용히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성찬, 너와 같은 편이 될 수 있을까?”
성찬은 대답 대신 묘한 웃음을 지었다.
“제가 말하는 ‘편’은 정치적 개념이 아닙니다. 이건 선택이에요. 누가 더 멀리, 더 현실적으로 생각하느냐의.”
“…시후는 반대할 텐데.”
“알고 있어요. 시후 형은 정직하죠. 그래서 저와는 달라요. 형은 판을 유지하려고 하고, 저는 새로 짜려 하니까요.”
하윤은 그제야 진심이 묻어난 눈빛으로 물었다.
“네 진짜 목적이 뭔데?”
성찬은 처음으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변하지 않는 시스템은 사람을 소모합니다. 누군가는 그걸 바꿔야 해요. 제가 그 역할을 하기로 했고… 선배는 그 변화의 ‘기준점’이 될 수 있습니다.”
“…기준점?”
“당신이 이사회에서 어떤 목소리를 내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저를 더 믿게 될 거예요.”
“…….”
하윤은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끝없는 연산이 돌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권력 제안이 아니다.
성찬은 나를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이용하려 한다.
그러나 동시에—
성찬은, 나를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믿고 싶어 하는 듯했다.
하윤이 천천히 물었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서게 되면, 넌 뭘 할 거지?”
성찬은 조용히 대답했다.
“이사회를 장악하고, STAR를 재편합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된, ‘그 계획’을 실행할 거예요.”
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그 계획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 진심은… 내가 직접 확인해볼게.”
성찬은 미소를 지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너무 정리되어 있다는 건… 누군가 보여주려고 한 거야.”
[STAR그룹 구 본사 12층 – 옛 시스템 접근실]
강시후는 어두운 사무실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오래된 단말기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화면엔 타임캡슐 시스템의 복원 로그가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정하윤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이거… 며칠 전 성찬이 네 폰으로 보낸 거지?”
“그래. ‘정지윤’의 타임캡슐. 원본 파일이라고 하더라고.”
하윤은 로그 파일을 넘기며 말했다.
“근데 왜 하필 지금, 왜 이 타이밍에 이걸 보낸 걸까?”
시후는 잠시 침묵하다, 모니터에 떠 있는 메타데이터를 가리켰다.
“이 캡슐은… 최근에 수정된 흔적이 있어.”
“성찬이 조작했다는 거야?”
“아니. 더 교묘해. 조작의 흔적이 ‘없게’ 조작된 거야.”
정하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시후는 계속 설명했다.
“처음에 우리가 봤던 타임캡슐에는, 단서가 부족했어. 지윤 누나의 모습도 뚜렷하지 않았고. 그런데 이번엔 너무 또렷해.”
하윤이 중얼였다.
“정말 누나가 직접 보냈다면, 저렇게 정확하고 또렷하게 남기긴 어렵겠지. 특히나… 그런 긴박한 상황에선.”
“그렇지. 게다가, 캡슐 내부에 삽입된 오디오 파일의 코덱이 바뀌어 있었어. STAR에서 기본으로 쓰는 포맷이 아닌, 성찬이 예전에 쓰던 모델이더라고.”
정하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럼 이건… 의도된 미끼일 수도 있다는 거네.”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고, 그 사이에 성찬은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거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정하윤이 조용히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할 거야?”
시후는 단단한 어조로 대답했다.
“미끼라면, 물리는 척하면서 거꾸로 추적해야지.”
그는 손을 들어 화면을 스크린 캡처하며 덧붙였다.
“이 로그엔 성찬이 남긴 ‘코드 패턴’이 반복돼. 내가 추적하면, 어디서 조작됐는지—근거지가 나올 거야.”
정하윤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얘는… 정말 계획적이야. 한 수, 두 수 앞을 보고 있어.”
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근데—우리도 그걸 알아챌 만큼, 꽤 가까이 왔다는 뜻이기도 해.”
[그 시각 – 성찬의 회장실, 내부 스크린]
모니터엔 ‘접속자: 강시후’라는 실시간 로그가 떠 있었다.
성찬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스크린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는 중얼거렸다.
“역시 형은 피하지 않는구나.”
그리고 조용히, 로그 우측 하단에 자동 회신 타이머를 설정했다.
72시간 후, 정지윤의 진짜 타임캡슐이 자동 전송되도록.
“게임의 마지막 열쇠는… 아직 내가 들고 있어.”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어느 쪽에도 설 수 없어.”
[STAR그룹 본관 – 37층 회장 접견실]
저녁이 막 내려앉은 서울. 회장실 유리창 너머로 붉게 물든 하늘이 드리웠다.
그 정적을 깨며 문이 열렸다.
“회장님.”
정하윤이 들어섰다. 안쪽 소파에 앉아 있던 성찬은 잔잔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앉으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윤은 조심스럽게 마주 앉았다. 실내는 조용했고, 두 사람 사이엔 커다란 결정 하나가 있었다.
성찬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번 이사회 안건. 하윤 선배의 ‘참석’ 여부에 따라 흐름이 달라집니다.”
“…내 표가 결정적이란 말이야?”
“정확히는, 선배가 누구 편이냐에 따라 나머지 이사들이 움직인다는 거죠.”
하윤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날 중립으로 보게 해놨으면서… 속으로는 그런 그림을 그렸어?”
“STAR는 이미지의 회사예요. ‘누가 어느 쪽에 섰는가’가 기업 가치 그 자체가 되는 구조.”
성찬은 테이블 위에 준비한 서류를 밀었다.
“이건 내가 준비한 전략안입니다. 이사회 설득용 문건. 선배의 이름이 공동 기획자 칸에 있습니다.”
하윤은 천천히 문서를 들여다봤다.
자료 말미에는, “이사회 신규 참여 멤버: 정하윤”이라는 항목이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하윤은 한참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이사라는 거야?”
“준이사 자격입니다. 내 안건이 통과되면, 선배는 정식 이사회 멤버가 돼요.”
하윤은 눈을 떼지 않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나야?”
성찬은 말없이 웃었다. 그리고 마치 오래 준비한 대답처럼 말했다.
“왜냐하면, 선배는 내 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생각했으니까요.”
하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지윤과 연관된 정보, 타임캡슐, 그리고 STAR의 변화. 누구보다도 중심에 서 있었던 선배. 그런 선배가 나와 함께라면—이 판은 쉽게 뒤집힙니다.”
하윤은 숨을 고르며 물었다.
“…이건 동료 제안이야, 아니면 거래야?”
성찬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둘 다죠. 선배는 날 의심해도 돼요. 다만, 이 흐름에 올라타면 선배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어요.”
하윤은 그제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조용히 물었다.
“시후는… 반대할 텐데?”
“그래서 미리 말 안 한 거예요.”
성찬은 태블릿 화면을 넘기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시후 형은 원래 의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의심이 방향을 틀면—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하죠.”
[이사회를 하루 앞둔 밤 – 강시후 집 앞 골목]
정하윤은 혼자 걸었다. 머릿속은 복잡했다.
성찬의 진심, 시후의 믿음, 자신의 선택.
그는 핸드폰을 꺼내다, 잠시 멈췄다.
시후에게 전화할까, 말까.
그 순간, 화면에 메시지 하나가 떴다.
[From 강시후]
“성찬의 코드를 분석했어. 드디어, 유사한 패턴을 추적 중이야.
내일, 진짜 진실을 밝힐 수 있을지도 몰라.”
하윤은 한참을 그 화면을 바라보다,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그 전에, 나도 선택을 해야겠지.”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미 이사회 참석 수락서를 전자서명한 상태였다.
"침묵은 찬성일 수도, 굴복일 수도 있다."
[STAR그룹 본사, 최고층 이사회실 – 오전 9시]
긴 테이블. 검정 양복 차림의 이사진들이 차례로 착석해 있었다.
묵직한 조명 아래, 회의실은 숨조차 무겁게 내쉬는 분위기.
한 명씩 참석자 명단이 확인되었고, 마지막으로 문이 열렸다.
정하윤이 들어섰다.
약간의 정적. 몇몇 이사진들이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신규 이사회 멤버, 정하윤입니다.”
그는 조용히 인사했고, 성찬은 자리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 배치는 절묘했다.
성찬과 하윤은 서로 마주보는 위치.
상무 이태석은 그 중간, 약간 측면에 앉아 있었다.
(이태석 상무는 더 이상 아무 영향력도 없었다. 직책만 간신히 유지한 채, 사실상 실각한 상태였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성찬이 안건을 꺼냈다.
“오늘 안건은 단 하나입니다. STAR그룹의 차세대 성장 엔진을 위한 데이터 윤리 기반 리셋 프로젝트.”
일순 정적.
몇몇 이사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AI상담센터와 타임캡슐 프로젝트, 내부 보안 시스템 개편, 윤리감사 부서 독립까지.
모든 것을 재구성하고, 이사회 직속 관리 체제로 만들자는 제안입니다.”
성찬은 단호한 눈빛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저는 이 프로젝트를 책임질 임시 집행 대표로 지명받고자 합니다.”
정적은 더 깊어졌다.
이태석 상무가 손을 들었다.
“이건 사실상 회장의 권한을 넘어서는 제안이야. 무슨 의도로…”
성찬은 그의 말을 자르지 않고, 조용히 응시했다.
“상무님, 이미 회장님은 사임서를 제출하셨습니다. 지금부터 이사회는 완전히 새로운 리더십의 방향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그 순간, 이사 한 명이 묻는다.
“회장님, 아직 젊으셔서 과감하신 전략은 좋습니다만.. 이 프로젝트로 STAR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겁니까?”
성찬이 입을 열었다.
“미래를 바꾸는 게 아니라, 준비된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는’ STAR입니다.
기술보다 사람이 먼저인 회사로요.”
순간, 무거운 공기 속에서 누군가의 한 마디가 날아왔다.
정하윤이었다.
“저는… 찬성합니다.”
모두가 그를 바라봤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신임 회장님의 방법엔 불안한 부분도 있고, 동의할 수 없는 선택도 있습니다.
하지만—지금은 누구보다 STAR의 구조를 꿰뚫고, 개편의 정당성을 준비한 분이기도 하죠.”
하윤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저는, 이사회가 과거의 안일한 구조 속에서 미래를 버려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하나둘 손이 들렸다.
“찬성.”
“찬성.”
“기권… 아니, 찬성.”
이태석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사회에서 그의 목소리는 이제 공허했다. 직함은 그대로였지만, 누구도 더는 상무로 인정하지 않았다.)
마침내 안건 통과.
성찬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결의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그의 눈빛은 냉정하고 명확했다.
그리고 정하윤은 마음속에 중얼거렸다.
“동료일까. 아니면, 이 게임의 진짜 설계자일까.”
성찬이 말한 ‘정리’의 시작은… 과거의 진실 복원이었다.
타임캡슐 시스템 내부에서 마지막 봉인이 해제된다.
그리고—시후가 끝내 열지 못했던 ‘그 메시지’가 드디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