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carry on, carry on
무엇이 그렇게 즐거워요?
나는 대학교 시절 별다방에서 2년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나는 시험 준비를 위해 잠시 다른 곳에서 자취를 했는데, 용돈만큼은 스스로 벌고 싶은 마음에 동네에 있는 스타벅스에 지원했다. 그곳은 4층 건물 전체를 매장으로 활용하는 대단히 큰 지점이었다. 대학가의 초입에 위치한 이곳은 항상 손님들로 붐볐고, 가진 것은 열정과 고뇌뿐인 학생들로 가득했다. 나는 누구나 그러하듯 청소부터 시작하여 차례차례 별다방의 주요 포지션을 배워나갔다. 우리 매장은 보통 3명이 바에서 일했고, 1명 정도 청소와 뒷일을 책임졌다. 한 달이 좀 지났을 때부터 나는 바 안(커피+계산)으로 투입되었다. 당시 나에게 아르바이트는 시험공부에 대한 약간의 해방을 의미했다. 그래서인지 그렇게 일이 재밌었다. 혼자 사람 좋은 척을 잘하는 나는 쉽게 단골들과 친해졌고 커피를 만들면서는 그 시간대의 분위기 메이커가 되었다. 내가 꿈꾸는 일하는 분위기를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파트너들과 이런저런 농담을 하며, 때로는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며 나는 최대한 즐겁게 일했다. 목소리도 항상 컸던 것 같다. 무선 진동기를 사용하지 않는 별다방 특유의 문화 때문에 나는 커피가 완성되면 그 손님을 찾으려 울부짖어야 했다. 일부 손님들은 내가 오버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목소리가 작았던 동료 파트너들을 배려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성격이 까칠하기로 유명한 부점장이 내 옆에서 일하다가 나를 보며 물었다.
"아니 도대체 뭐가 그렇게 즐거워요?"
나는 평생 처음 받은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지만 그냥 멋쩍게 웃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나는 시험공부라는 강박의 시간을 탈출하여 일을 했다. 그 속에서 목표를 향해 달리는 비슷한 청춘들을 만났다. 공감했고 즐거웠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우리도 낙이 있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깨방정'을 떨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어떤 환경에서 즐거운지 살며시 알게 되었다.
인상 쓰지 마. 너 혼자 힘든 거 아냐.
그리고 나는 취업을 했다. 거친 상남자들이 많은 회사였다. 서로의 생존이 1순위인 곳이었고, 대부분 날이 선체로 일을 했다. 나는 경영지원에서 근무했는데 용어 그대로 우리는 '지원'을 해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판이하게 달랐다. 대부분의 선배들은 본인이 지치고 힘든 것을 연락이 오는 현업에게 풀었다. 까칠했다. 그래서 뭐 어떡하라는 거냐? 나에게 그걸 왜 말하는 거냐? 이런 식의 대화는 종종 내 주위에서 들려왔다. 나는 다르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공손함과 예의를 잃지 않으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사회는 녹녹지 않았다. 일부는 '너 잘 만났다'는 듯 다짜고짜 화부터 내는 경우도 있었고, 혹자는 '너 따위가 뭘 아냐'는 듯 비아냥 거리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은 이래서 선배들이 그렇게 날이 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같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보통 이러면 스트레스는 오롯이 스스로의 몫이다. 어느 날 나는 책상에서 연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과장님이 그런 나를 보고 한마디 던지고 지나가셨다.
"인상 쓰지 마. 너 혼자 힘든 거 아냐."
난 내가 인상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았다. '짜식이 많이 찌들었네' 하는 생각을 들었다. 그리고 과거의 나를 돌이켜봤다. 나는 별다방에서 지금보다 적게 벌어도 행복했는데,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그 당시 돌아본 과거의 나는 정말 돌아가고 싶은 시절의 나였다. 일을 하며 마냥 행복했던 그때가 그리웠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어떻게든 즐거워보자는 목표를 세웠었다. 물론 실현보다는 절망이 더 많았다.
신흥종교 '어쩔랑교'
얼마 전에 어머니와 TV를 보았다. 사실 나는 TV를 거의 안 보는 편인데 그날따라 식사 후 왠지 모르게 소파에 앉아 다큐멘터리 비슷한 방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많은 형제들이 있는 집안이 새해를 맞이하여 여행을 가는 내용이었다. 친가부터 외가까지 모이다 보니 50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정육점 하시는 사위는 고기를 잔뜩 가져오셨고, 다른 사위들은 연신 고기를 굽고 잔일을 맡았다. 행복한 모습이었다. 대학생들이 MT를 온 것처럼 다 큰 성인들이 새벽 4시까지 노시는 것을 보는데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한 분이 하신 말씀은 바로 내 수첩 속으로 기록되었다.
"제가 요잉. 믿는 종교가 하나 있습니다. '어쩔랑교' 에요. '아따 그럼 어쩔랑교. 그냥 해야지', '아이고 그랬구먼. 어쩔랑교. 너무 괘념치 마이소.' 이렇게 말하면 세상 살기가 좀 더 편해집니다."
나는 묘한 공감을 느꼈다. 세상만사는 하나하나 곱씹어보고 분석하면 골치만 아픈 곳이다. TV 속에 나오는 인상 좋은 아저씨의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팁을 알려주시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수첩 속에 내가 얻었던 팁들, 내가 중요하다 생각하는 가치들이 무엇인가 적어보기 시작했다.
언제가 나는 행복했고, 언젠가 나는 괴로웠다. 그 시간들을 지나온 나는 얼마나 달라져있을까?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을까? 그렇게 과거의 나를 되돌아보면 생각보다 얻어지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습득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난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며 지켜오고 있는 신념들, 무엇은 꼭 이루고 싶다는 목표들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 그렇게 우리는 수많은 시간과 풍파 속에서 소중한 교훈들을 얻었던 것이다. 나도 몇 가지가 기억이 났다. 그중에는 '배려'도 있었고, 과거에 행복하게 일했던 나에게 배운 '일하는 방법' 도 포함되어있다. 이제는 일을 하며 행복보다는 스트레스가 많은 현재의 나에게 하나를 더 추가하고자 한다.
"어쩔랑교. 그냥 그럴 수도 있겠지. 저는 그냥 저의 길을 가겠슴니더."
(죄송합니다. 서울 사람이라 찰진 사투리가 되지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