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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틈에서 자라는 것//부고(訃告)의 이중언어

15화. 돌아가는 곳, 그 평온함에 대하여


2025년 11월 23일 일기글에서 발췌
'삶'과 '죽음'이 평행선처럼 달린 날

인천마라톤대회가 열리는 오늘, 안타까운 비보와 약속된 풀코스 도전이 평행선처럼 나란히 놓였다. 한쪽에는 중학교 절친 아버님의 부고(訃告)가, 다른 한쪽에는 마라톤 동호회 회장으로서 완수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누군가는 자신과의 약속, 그리고 동료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용기와 환호, 흥분을 안고 인천의 도로를 마라톤 완주라는 목표를 향해 달린다. 그러나 같은 시간, 누군가는 부모님을 떠나보내는 장례의 예절을 지키며 깊은 숙연함 속에 잠겨 있다. 우리는 저마다의 사정에 맞춰 생각과 감정을 선택하며 살아간다지만, 나는 오늘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열정과 슬픔이라는 이질적인 두 감정을 동시에 품고 달리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편안하지 않았다.


친구와 슬픔을 나누러 당장이라도 달려가야 했지만, 회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지금은 나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자기 합리화가 발목을 잡았다.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어, 달리는 내내 죄책감이 마음 한켠을 떠나지 않았다.


우선, 지금에 충실하기로 했다. 회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하기 위해 편치 않은 마음을 안고 풀코스를 완주했다. 불편함이 달리는 중간에 체력 고갈로 이어졌던 것 같다. 대회 종료 후 완주자들을 일일이 격려하고 회원들과 기쁨을 나누는 공식적인 일정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천안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다리는 천근만근이었고 누적된 피로에 눈꺼풀은 해가 지는 때를 맞춰 자꾸만 내려앉았다. 하지만 상주로서 슬픔과 장남의 무게를 견디고 있을 친구를 생각하니, 출발 전 느꼈던 마라톤의 열정과 기쁨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대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안단국대학교 장례식장에 도착해 미리 와 있던 친구와 함께 조문을 했다. 나는 국화 한 송이를 예를 다해 올렸고, 친구는 향을 피웠다. 상주의 뜻에 따라 고인에게 마지막 술을 올리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장인어른을 떠나보냈을 때와는 또 다른 결의 슬픔이었다.


고인과 유족의 사랑, 갱춘기의 균열과 노년기 준비의 틈

고인은 내게 특별한 분이셨다. 바둑, 서예, 문인화 등 취미가 비슷해 세대 차이를 넘어 깊은 대화를 나누곤 했다. 같은 교직에 계셨기에 동질감 또한 남달랐다. 특히, 갱춘기를 견뎌내며 노년기를 준비하는 내게는 또 다른 의미의 상황이었다. 신체적 나이에 의해 무너져간다고 무력하게 대응할지, 극복하기 위한 대응 방안을 준비하며 나름의 삶의 패턴을 만들지 생각과 감정의 틈이 생겨나며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고인의 가족들과도 가깝게 지냈던 터라, 오랜만에 만난 어색함은 유족들의 환대 속에 눈 녹듯 사라졌다. 친구와 유족들은 40년 만에 만나는 나를 과거와 다름없이 편안하게 대해주었고, 고인과의 추억과 남은 이들의 현재 생활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를 나누며 애도의 마음을 잠시 접게 했다. 유족들은 슬픔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고인에 대한 애도와 더불어 '편안한 안정감'을 선택한 모습이었다.


유족들은 믿고 있는 듯했다. 고인이 이제 고통 없는 세상, 본래 우리가 왔던 그 평온한 곳으로 '돌아가셨음'을. 생전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 간 충분히 사랑을 나누며 이별 연습을 했었기에, 슬픔을 안정감으로 승화시킨 그들의 모습에서 장례식장은 비통함이 아닌 따뜻한 '배웅의 공간'이 되었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대화 속에서 나는 최근 어떤 장례식장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을 경험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건, 그곳이 '죽음(끝)'의 현장이 아니라 '돌아감(회귀)'의 현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친구 아버님의 빈소에서 느낀, 그리고 우리네 삶의 끝자락에 대해 이방인으로서 자문하는 자작시 한 편을 소개한다.


부고(訃告)



옆집

노파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뒷집

총각이

죽었다고 한다.


우리 삶은

끝자락에서

돌아가는 걸까?

죽는 걸까?


누가 돌아가고?

누가 죽는 걸까?


우리는

때가 되면

죽지 말고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나, 돌아갈래!"



[틈에서 자라는 것]
2019년 부고(訃告)를 12월에 집중적으로 받게 되었다. 아마 추위를 이기지 못한 어르신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빈소에서 자주 듣게 되는 말 중 누군가는 '돌아가셨다.' 누군가는 '사망'하셨다.라고 말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순간 '돌아가신 것'과 '죽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라고 나에게 질문을 하게 되었고 생각과 감정의 균열이 새로운 생각과 감정이 자랄 틈을 만들었다.
단어가 주는 의미대로 '죽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 관계 등 모든 것과의 단절이다. 심지어 생각과 감정과도 이어짐이 없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돌아가신 것'은 이미 다른 삶이 있어 현재의 삶을 여행 삼아 잠시 즐기다 원래의 삶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해석된다. 후자가 훨씬 희망적이지 않은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고 지금의 삶의 여정이 귀하게 여겨지니 말이다.

그러니 이방인의 시선으로 지금의 삶을 새롭게 재해석하며 여행온 삶을 즐기며 행복을 찾는 지혜를 찾으면 좋겠다. 그러고 나서 돌아가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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