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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갈비와 파김치

by 해보름

출간이 되고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마치 100미터 단거리를 전력 질주 후 바로 멈출 수 없듯, 나는 여전히 가속도의 여운 속에 뛰고 있었다. 그러나 속도를 줄이자,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먼저 가정을 살폈다. 아이와 함께할 시간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어수선해졌던 집들을 정리하고 먹거리를 돌아본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반찬이며 재료가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텅 비어 있다.


최종 수정작업이 한창이던 시기엔 그때그때 간단히 해 먹을 수 있는 것 위주로 끼니를 해결하며 지냈다. 아이를 위한 반찬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 아이는 며칠 동안 김에 밥만 싸서 저녁을 때웠다고 한다. 그마저도 내가 아이 밥 먹을 때 옆에 있지 못해 남편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줘야지.’

고기를 잘 먹지 않는 아이가 유일하게 먹는 고기가 떠올랐다. 그건 바로 한국에서 외할머니가 해주셨던, 손으로 붙잡고 먹는 고기, LA갈비였다.


양념을 직접 만드는 일은 거의 해본 적이 없던터라 큰 마음을 먹어야 했다. 결혼초 한 두 번 정도 직접 불고기를 재워봤던 기억이 났다. 레시피를 다시 한번 검색하고, 양념 재료도 사고, 평소 잘 가지 않는 대형 마트에 가서 질 좋은 고기를 샀다.


다음 날, 아침부터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양념 준비에 들어갔다. 레시피대로 재료를 다듬고, 믹서에 갈아 양념장을 만들었다. 피를 뺀 고기를 깨끗이 헹궈 물기를 뺀 후 하나하나 정성껏 재워두었다. ‘엄마가 우리 먹일 요리를 해두시면 이런 마음이셨겠구나.’ 아이가 며칠을 맛있게 먹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벌써부터 설레었다.


저녁이 되어 구운 LA갈비를 아이에게 내밀자,

“이야, 내가 좋아하는 잡고 먹는 고기다!” 하며 신나했다. 그리고 평소보다 훨씬 많이, 맛있게 먹었다.

아이의 행복한 표정을 보자, 그 배부름이 두 배가 되었다.


결혼 전, 전업주부로 지내시며 가족의 밥상을 책임지던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간단하게 할 것만 하고 나머지는 편하게 사 먹자고 해도 굳이 재료를 손질하고 직접 요리하시며 음식에서만큼은 타협하지 않으셨던 엄마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며칠 뒤, 주말엔 한국 마트에서 사두었던 쪽파를 꺼내 다듬었다. 이번엔 남편과 내가 먹을 파김치를 담갔다. 이것또한 나에게 첫 도전이었다. 김치는 재료 준비와 손질이 일의 절반이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웬만해서는 사 먹지만 외국에서는 사 먹는 것의 제한이 있으니 먹고 싶은 것은 해 먹어야 한다.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파김치를 선택한 것은 그동안 제대로 된 반찬을 해주지 못한 미안함에서였다.


파김치 담그는 것은 신랑과 함께였다. 쪽파를 다듬고 양념장을 만들며, 서로의 취향에 맞게 조절하며 같이 완성했다. 첫 작품치고 맛이 꽤 괜찮았다. 남편은 장모님이 해주신 것보다 더 맛있다며 흡족해했다. 못한다고 생각하기에 못하는 것이지 막상 해보면 할 수 있구나.’ 결혼 후에도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은 엄마가 늘 해다 주셨기에 김치는 엄마의 몫이고 내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한계를 오늘 넘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외국에 나와 살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새로운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늘 친정엄마와 언니 곁에서 의지하며 살았다. 처음엔 둘째이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편안함의 고리를 내가 스스로 끊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남편과 함께였지만, 철저히 혼자였다. 나 혼자 서야만 둘이 함께 설 수 있었다. 둘만 있는 곳에서 한명이 누군가에게 기대서는 둘 다 설 수 없었다. 처음엔 두려웠고, 다시 가족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지금은 정말 ‘나만의 무대’ 위에 서 있다.


이 새로운 땅에 다시 돌아오자마자 시작된 출간 작업도, 돌이켜보니 어쩌면 우연이 아니었다. 출간 작업동안 누구의 도움없이 글작업과 살림, 육아를 병행하며 버텨야 했던 그 시간은 하나님이 다시 이곳에 온 내게 주신 일종의 테스트이지 않았을까? 고비도 있었고,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 고비를 넘겼다.


그리고 그 후, 손으로 직접 만든 음식을 가족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그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못한다’며 내 스스로 그어놓았던 경계, ‘이건 내 일이 아니야’라고 외면해 왔던 영역. 그 모든 선을 하나씩 넘었다.


작지만 확실한 하나의 열매. 그 열매를 맺어본 사람만이 그 기쁨을 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또 다른 열매를 향해 나를 걷게 만든다.


글도, 삶도, 그렇게 나는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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