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양이삼거리 May 30. 2023

텃밭

다른 이야기와 달팽이

 

 오래전 이야기이다.


 지쳤다고 생각했을 때, 하루 휴가를 내고 미술관에 갔었다. 어떤 기획의 전시였는 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계단을 내려가서 오른쪽 복도를 따라 벽을 꺾어 만든 공간들을 지나다가, 어느 모퉁이에서 멈췄고 몇 발자국을 되돌아가서 그 커다란 사진 앞에 섰다. 뒤로 물러나서 반대편 벽의 끝까지 가야만 전체를 볼 수 있었다, 벽면을 채우고 있는 텅 빈 거리의 푸르스름한 모습. 다시 길을 가려는데, 도로 위에 스쳐진 붉은 후미등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았다.


 자전거 타고 가는 사람, 걷는 사람, 자동차들, 모두 거기에 있었고 커다란 캔버스에서 쏟아져 나왔다.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저기로 그들이 가는 길에 모두 남겨졌다, 와우. 혼자서 오롯이 즐긴 그 순간은 짜릿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온에어' 프로젝트에서 김아타 작가가 보여주는 '존재하는 것들의 사라짐' 대신, 나는 텅 빈 도시에서 남겨진 사람들의 흔적을 찾고 흥분했었다. 그래도 무언가 작품과의 긴밀한 교감을 했다는 것이 나에게 꾀나 기분 좋은 사건이었고, 지금도 그런 경험은 많지 않다. 망설임과 부끄러움 혹은 조급함, 공감 없는 예의 차림을 버리고, 눈을 더 크게 뜨고 순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친해질 기회를, 한걸음 더 다가갈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내가 그린 스케치를 집중해서 유심히 보아주던 그녀의 눈빛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부분이 좋아요.' 그에 반해 다른 생각에 빠져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던 나는 별다른 질문을 할 수 없었다.


달팽이와 상추


 텃밭 달팽이는 상추를 타고.

 상추 위에 놓였던 달팽이는 플라스틱 그릇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와서, 틀의 가장자리를 따라 한 바퀴 집중해서 주변을 탐색했고, 두장의 상추 깊은 곳에 가서 숨었다.

이전 08화 만둣국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