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쌀쌀해져서 긴 팔 옷과 카디건 점퍼를 꺼내 놓았다. 우리의 겨울 아이템 야크털로 짠 네팔모자를 찾아서 쓰고 반팔 여름옷을 개고 들여놓다 보면, 또 정리할 것은 없는지 주변을 살피게 된다.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어두운 색의 옷들 위주인 옷장인데 오히려 겨울은 털모자와 장갑, 두꺼운 양말들, 셋이 힘을 합쳐 짠 목도리 같은 것들로 채워지면서 사람이 알록달록 해진다. 가을 이맘때 잘 보이는 곳에 펼쳐놓으면 퍼석해지던 집의 분위기가 포근하게 바뀌고, 며칠 더위에 들이키던 물을 찾지 않았다는 걸 알고 나면 그래서 이렇게 건조한가 보다 하면서 물을 채워나간다. 그리곤 그 기운으로 어슬렁 거리면서 책장이랑 책상 서랍들도 한 번씩 들여다보고 한동안 쓰지 않았던 노트를 열어서 살펴보고, 여기 저장글 목록도 살펴보고 글을 한 줄 채워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중 하나인 요리 공책을 열어서 이번 요리를 보완한 다음번 돼지목살양념구이 요리법을 적어놓았다. 손에 잡힌 물건들을 제자리에 어울리게 말끔하게 정돈하는 것과 보일 듯 말 듯 한 구름 속의 저장된 파편들을 정리하는 것은, 단어를 떠올리는 것은 그 시작점을 찾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주머니가 달린 긴 장대를 저으며 가까이 혹은 멀리 잘 익은 감을 골라 따는 것이다. 먼저 떨어 저버린 감을 뒤로하고, 새들이 쪼아낸 것을 살피면서. 그것들은 달콤하고 적당히 끈적인다. 입안에서 숨결로 뭉근하게 우물거리다가 씨를 톡 뱉어낸다.
이렇게 계절을 보내는 것이 좋다.
가을은 수확의 시기답게 밤이며 고구마, 추석 음식들과 김치도 많이 주시기에 집에 가져와서 차곡차곡 잘 정리해 넣다 보면 냉장고까지도 들여다보게 되고, 부엌도 한번 더 정리하게 된다. 올해는 이미 우리 집도 풍년인 고추가 계속 식탁에 오르고 있지만, 먼 누군가가 고추밭에서 수확한 것을 의무적으로 커다란 봉지 가득 받아오기도 했다. 우리 집은 꾀나 작동 시스템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작은 변화가 생기면 다시 살펴서 그것들 위한 적정한 공간이라던지 작동법이라던지 하는 것을 점검해야 한다. 이번에 바꾼 것 중에 냉장고 안 소스류 배치가 있었다. 원래는 냉장고의 문간 수납의 제일 아래 얕은 수납칸에 냉장보관 하는 소스들이 있었는데, 들기름만 빼고 그것들을 냉장고의 제일 깊은 곳, 손 잘 닿지 않는 한 겹 안으로 이동했다. 이게 어떤 일을 만들었냐면, 냉장고 문에 위치한 음료수 칸이 부족해서 빈 구석 여기저기에 넣어놓았던 음료들을 한 곳으로 넣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본체 칸칸이 원래 위치에 있던 것들을 가리지 않아서 확인하기 쉽고 꺼내기 편하게 되었다. 문짝 수납은 네 칸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제일 위쪽 손바닥 가로길이 정도 높이의 낮은 곳에는 치즈나 요구르트, 초콜릿류가 주로 놓이고, 아랫칸 그보다 조금 더 높은 한 뼘 정도 공간에는 캔이나 팩에 들은 우유음료, 주스, 커피가 들어간다. 가끔은 스파게티 소스나 피클 병이 들어가기도 한다. 가장 중심이 되는 높은 칸에는 부피가 있는 우유, 물, 페트병 음료 등이 놓이는데 가끔 여기에 1/3 높이의 파뿌리가 봉투에 담겨 꽂아지기도 한다. 제일 낮은 곳, 소스들이 있던 칸에는 이제 들기름 병과 막걸리나 맥주 같은 어른들의 음료가 들어갔다. 생각해 보니 소스는 아주 가끔씩만 쓰기 때문에 필요할 때 위치가 확실하면 꺼내는 것은 별일이 아니었다. 이런 일을 또 자연스럽게 이어가다 보면 주변이 말끔해지고 따뜻한 차 한잔과 책상에 앉아서, (어느 순간) 이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때이구나 그래도 되겠구나 하는 기운을 얻게 되는 것이다. j가 모든 일을 시작할 때 하는 말이다. '모든 영웅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뭔지 알아? 청소야!' 그러곤 작은 싸리 빗자루로 책상 청소를 시작한다.
며칠 드는 생각인데, 나에게 계절의 변화가 더 빨리 오는 것 같은 이유는 아랫마을보다 체감상 1도 낮은 것 같은 집의 지대 때문이다. 서울 시내 나들이를 다녀와도 온도 차이가 느껴진다.
올해 가을에 나는 조금 엉뚱하지만 네이버 블로그가 20주년을 맞았다는 메시지를 보니 그때 내가 첫 직장에 들어간 사건이 생각나서 브런치에 남긴다. 이건 어떤 시작에 대한 것이고, 그 일은 꾀 이야깃거리가 된다. 요맘때, 졸업작품 전시를 마치자 그제야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은?’ 다음을 생각해 본 적 없이 그저 학교 생활을 즐기던 나는, 그제야 학교를 졸업하다는 것을 실감했고 그다음, 졸업 후를 생각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대학원에 간다는 사람도 있었고, 이미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잠깐 생각해 본 결과, 시작은 사회인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서 직장에 들어가기로 했다. 요즘 졸업과 취업을 위한 사람들의 진지한 준비와 노력을 생각하면 이 일이 황당하게 다가올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그럴 수 있던 때였다. 공부를 더 하겠다는 생각이 없었고, 사실 어떤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다만 성인으로 학교 공부가 끝났고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이 들었지만 약간의 설렘도 함께였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일을 구하는 방법이었던 (그맘때 한창 광고를 했던) 구인사이트를 뒤적이며 건축설계사무실 모집 공고를 찾았다. 그중 하나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했는데 하필 마감이 당일 이어서 무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나는 '졸업예정' 외에 적을 것 없는 이력서를 바라보다가, 그때 즈음에 교내 독후감 대회에 냈던 글을 이력서의 자기소개란에 붙여 넣기 해서 급하게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주말에 자격증시험을 보러 다녀오고 나름 분주한 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사무실은 양재동 조용한 주택가에 가을의 노란 나뭇잎과 햇살이 아늑한 공원 옆 건물 2층에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다양한 연령대의 네다섯 명 정도가 대기하고 있었다. 무척 긴장되는 날이었다. 테이블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렸다.
소장님 업무실에 들어가서 인사를 하고 책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내가 보낸 이력서 페이지들이 흩어져 놓여있었고, 그 안에 빨간 펜으로 체크된 흔적들이 보였다, 아무튼 조금 긴 페이지들을 꼼꼼하게 읽으신 흔적이 있었다. 그 노트들은 나를 더 긴장시켰다. 내 눈길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걸 보시고는 놀리시듯 얘기하셨다. "이거, 내가 잘 안 읽어볼 줄 알았지?" 그 책은 전혜린이 번역한 루이제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였다. 어떤 질문을 하셨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들의 분위기는 기억하고 있다.
생의 한가운데
그렇게 면접을 보고 사무실 분위기도 익숙해진 어느 회식 날 선배가 물었다.
"00 씨는 왜 우리 사무실에 이력서를 넣었나요?"
"직원모집 같은 다른 사무실 공고와 다르게 '설계 함께 하실 분’이라고 쓰여있는 게 좋았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거 내가 쓴 건데!"
선배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회식의 다음날은 늘 모두 사무실 근처 닭 한 마리 집으로 가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맛집으로 꾀나 유명해서 북적이는 식당이 한산한 시간이다. 넓고 납작한 전골냄비에 파, 마늘 육수와 닭이 토막으로 들어가 있고 0.8cm로 썬 감자가 익을 때 즈음, 고기를 건져서 양파부추간장소스와 곁들여 먹으면서 계속 끓인다. 국물이 진해지면 밥을 넣고 또 푹 끓여서 죽을 만들어서 한 그릇 먹고 나오면 하루 일과의 반나절이 지나간다. 닭 한 마리는 그때 처음 먹어본 것으로 뽀얀 국물에 우려 지는 닭과 고소한 감자, 가벼운 물김치와 양념에 같이 나오는 부추 절임이 매우 맛있었지. 이것은 오늘의 우리 집 식탁에 종종 올라오는 메뉴이다. 가끔은 김치를 넣고 끓여 먹는다.
나는 그렇게 작은 건축사사무소에 포트폴리오가 아닌 독후감을 내밀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쓴 이력서였고, 어쩌면 아주 수월하게 첫발을 내디뎠다. 소장님의 실무 교육에 힘입어 기초를 쌓았고 조금씩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자기의 삶과 일터를 단단하게 가꾸는 사람과 한 공간에서 같이 일을 해본 다는 것은, 그 분위기와 밀도를 지켜보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일한다는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기본과 어떤 일을 결정하는 과정, 낭비 없는 태도, 그것들을 선배로써 함께하는 직원들에게 보여주셨다. 나는 겁을 잔뜩 먹고 조금씩, 딱 내가 소화할 만큼만 나아갈 수 있었고 지금도 크게 바뀐 것은 없다, 그만큼씩 내 공간을 확장하고 있다.
소장님께 배운 것,
생각을 합리적으로 밟아 나가면서 어떤 일을 결정하고 진행하는 것.
우선순위에 맞춰 체계를 세우고 지켜나가는 것.
한참 후에 만난 소장님께서는 내가 그때 만들어드린 음악 cd를 지금도 가끔 들으신다고 했다. 그걸로 미루어보아 나는 잃어버린 그 이력서를 지금도 가지고 계신다면 그건 지금의 내가 쩔쩔맬 아주 부끄러운 한구석일테다. 그걸 생각하니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이 맞는가 생각이 들지만 지금 하고 싶은 일은 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 j는 늘 옆에서 이렇게 얘기해 준다. 이곳이 나의 홀로서기의 시작이다.
얼마 전에 잊고 있던 책장에서 하루키의 책 '고독한 자유'를 펼쳐보다가 생각해 봤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50m씩 해치우기를 마음에 두고 반환점이라 마음먹은 순간들이 있는데, 몇 번을 수정했다. 오늘은 또 지금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도 그렇게 일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지금 내가 함께하고 있는 사람은 굉장히 자유로워서 나는 예전에 시스템에 맞는 양식을 만들었다면, 지금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곳에서 시작한다. 시작은 어딘가가 될 수 있고, 그것이 좋은 시작이 될지는 혹은 어떤 시작이 될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가면 된다. 그 지점을 찾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다만 나는 그때, 내가 돌아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기억하고 있고 그것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어떤 때 든든함이 되어주기도 하다가, 또 어떨 때는 논점을 흐리는 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두렵기도 한 혼란스러움에 빠져있기도 하다. 그곳에서 다시 50미터씩 해치우기를 반복하며 부유했던 것들을 하나씩 잡아 자리를 만들고 그걸 다시 바꾸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고 있다는 그 점에서 이곳이 나의 반환 점이라고 생각해 본다.
이곳은 따뜻함과 차가움과 미적지근함이 공존하는 곳으로 요리의 온도라고 할 만한 것이다. 사람의 온도라고 할 만한 것이다. 지글지글함 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약간 데운'이 있다는 것. 열정적인 사람과 차분하고 냉철한 사람들 사이에 수더분한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 각자의 온도일 뿐 그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데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조금 능글맞아졌다고 해야 할까, 나는.
그나저나 가을에 무언가 마감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결실을 볼 수도 있고, 훌훌 털어버릴 수도 있는 적당한 때이다.
관련요리법
김치닭한마리 https://brunch.co.kr/@bluetable/155
매주는 벌써 힘들 것 같습니다,
(그냥) 목요일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