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한참 예전에 급하게 식탁을 차리면 꼭 그릇이 모자라곤 했다. 세 식구에 맞춰진 구성이어서 반찬그릇 하나를 다른 용도로 쓰면 그 윗 단계의 그릇들로 이어지면서 삐그덕거리는 상차림새가 되는 것이다. 손에 먼저 잡힌 접시에 간장을 담아서 놓았더니 모든 게 어색해졌다.
종지
시작은 종지다. 종지가 아마도 가장 작은 그릇의 단위일 것 같다. 종지보다 조금 크고 넓은 종발이 있고, 종발은 중발과 종지 사이의 그릇이다. 집에 세 개의 종지가 있다. 종지는 보통 장류를 담는데 쓰는데 간장종지라는 말이 익숙하고 젓갈류나 기름을 담아내기도 한다. 예전 종지는 약간 움푹하게 만들어서 종발에 쓰인 한자인 '종, 鍾' 술잔의 형태인 것 같은데, 요즘 종지는 얕은 접시 형태가 많은 것 같다. 반찬그릇의 종류로는 보시기, 옹파리, 쟁첩/접시, 종지가 있다고 한다. 김치(보시기), 동치미(옹파리)를 잘 담을 수 있는 형태의 그릇 이름이 따로 있을 정도다.
우리 집에서 주기적으로 등장하면서 식탁을 가득 채우는 상차림은 삼겹살을 먹는 날이다. 제일 작고 납작한 무지 종지에 새우젓을 담고, 도톰하고 귀여운 고양이 무늬의 종지에 굵은소금-기름을 한다. 기름은 들기름이나 참기름을 주로 하는데, 둘 다 없을 때는 올리브기름으로 한다. 남은 물방울 모양 조금 깊은 종지에 저민 마늘과 된장, 고추장을 채운다. 그리고 나의 스테인리스 스퀴저의 계량컵에 동네에서 가장 좋은 상추를 살 수 있는, 고깃집에서 주신 양념하지 않은 생파채를 짧게 썰어서 담고, 가끔은 등산용 시에라컵에 고추나 오이 그때그때의 과일이 담긴다. 상추는 j와 내가 같이 먹는 것은 깊은 직사각 플라스틱 통에 담고, r은 둥글고 얕은 중발 크기의 플라스틱 그릇에 따로 담아 옆에 놓아준다. 그리고 정사각형 얕은 유리반찬 그릇에 김장 김치를 썰어 담고, 여름에 열무물김치를 놓을 때는 직사각형 얕은 유리 반찬 그릇에 반은 열무를 썰어서 담고 반은 국물을 뜰 수 있도록 비워서 담는다. 밥그릇과 보리차가 담긴 컵을 놓고 나서 마지막으로 잘 구워진 삼겹살 접시가 가운데 놓이면 완성이다. 그럼 빠짐없이 식탁이 채워진다. 이렇게 그릇을 맞춰놓으면 편하다. 밥을 올리고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여서 한편에 옮겨 놓는다. j가 고기를 굽기 시작하고 그 사이에 내가 식탁을 차린다. 이 과정은 매번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거의 기계적인 움직임과 정해진 동선으로 우리는 움직인다.
‘밥 먹자!’
집 길들이기, 그리고
길들여지기.
길들임은 여우와 어린 왕자 사이의 관계만은 아니다. 길들여진 프라이팬에 대한 만족감 만도 아니다. 부엌에서, 집에서 잘 맞는 것, 잘 맞춰진 것을 발견하고 볼 때면, 꼭 그렇게 하고 나면 그렇게 뿌듯하면서 즐거울 수가 없다. 그건 요리법이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합이 되기도 하고, 정리된 모습이기도 하고, 혹은 아무렇게나 놓아진 모습이기도 하다. 집을 길들이고, 그 길들여진 집은 편안하다.
이사하면서 바뀐 환경을 대하다 보니 모든 것을 새롭게 정리할 기회가 있었다. 일단 제일 중요한 책장과 테이블들 위치는 신중하게 정하고 채워지는 것들은 당장은 제자리 만들기가 필요하니 하나씩 손에 쥐고 살펴보면서, 몸을 움직이며 이렇게 저렇게 해보았는데, 특히 부엌은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조금씩 정리했던 생각들을 떠올리며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순식간에 마무리했고 크게 바꾼 것 없이 잘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시간이 조금 지나서 그렇게 우리가 만들어 놓은 집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에 대해 써보고 있다.
사소한 것이지만 습관 들이기 애 먹은 것이 있었는데, 가스 중간 밸브를 바로 잠그는 것이었다. 예전 집에서는 가스레인지의 오른편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닿는 곳에 중간 밸브가 있어서 몸을 움직이면서 쉽게 확인하고 손을 뻗어 바로 껐는데, 이번에는 가스레인지의 왼편 창문의, 아래쪽 벽을 따라 시선과 손 높이가 애매한 위치에 있어서 불을 끄고 그릇에 담거나 식탁으로 옮길 때 오른편 식탁 쪽으로 움직이면서 중간밸브를 잠가야 한다는 것을 바로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안전과 연관된 것이어서 중요한 부분인데, 사실은 잘 보이고 아니고, 손에 닿던, 아니던을 떠나서 '중간밸브를 바로 잠근다.'가 우선 되었어야 하는 것이 맞다.
잘 맞는 것, 수납
예전에는 움직이는 범위에 있지만 시선이 가려지는 곳에 두루마리 휴지 비닐팩을 놓아두었었는데, 이번에는 위치가 마땅치 않았다. 그때는 방 하나를 다용도로 사용하면서 냉장고도 넣어서 부엌이기도 하고, 세탁기와 건조대도 넣어서 세탁실이기도 했으며, 옷장과 보관용품들이 들어있는 옷방이기도 하고 화장대와.. 쓰다 보니 많지만 거의 모든 집안 활동을 하는 공간에 같이 넣어두었었다. 그리고 남은 방은 휴식을 위해서만 썼다. 이번에는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r에게 큰방을 주고, 그의 모든 기념 물건들까지 넣어주었고, 남은 방 둘은 짐이 많이 비워진 상태에서 j와 내가 휴식공간과 작업실로 나눠서 쓰고 있다. 물론 부엌도 이번에는 완전하게 분리되었다. 무척 신경 쓰인 것이 의외로 두루마리 휴지였다. 모두가 사용하니 각자 꺼내 쓰기 편하고 습하지 않은 공용실에 있으면 좋겠는데, 한 묶음이 부피가 큰 편이어서 놓였을 때 비닐 포장이 거슬리지 않아야 하고 사가지고 와서 정리하기 간편해야 하는 점을 해결해야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집수리용품을 구입하고 가져온 대형 종이봉투였다. 어쩐지 딱 맞을 것 같았는데, 역시나 한팩을 넣으니 쏙 들어갔다. 그리고 어쩐지 높이가 딱 맞을 것 같았는데, 부엌에 놓아둔 움직이지 않는 의자 아래에 놓아보니 이거다 싶게 딱 맞았다. 휴지를 사가지고 오면 가위로 반듯하게 윗면을 자르고 종이봉투에 넣어서 의자 아래에 놓는다. 키친타월도 같이 보관한다.
그러나 이건 역시 우리 집의 사정이어서,
남의 집에 놀러 간다면 그 집의 사정을 파악하고 따르는 것이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일요일에 썼습니다.
(남의) 집 사용법, Y 감독님 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