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스퀴저
지금 가지고 있는 부엌 도구 중에 내가 오래전에 신중하게 고른 스테인리스 재질의 착즙틀이 있다. 스퀴저를 뭐라고 쓸까 생각하다가 '착즙기'가 있는 것에 착안해서 착즙인데 '기기'는 아니니까, '강판'이 생각나긴 했는데 '판'의 형태는 아니니까 '틀'이라고 써보았다. 착즙틀 본체 아래, 안쪽에 250ml까지 계량 눈금이 새겨진 손잡이 달린 컵이 세트로 되어있다. 컵은 액체를 따르기 편하도록 작고 넙적한 형태의 주둥이 모양이 살짝 잡혀있고, 손잡이와 그 주둥이 부분으로 지지해서 본체 틀이 움직이지 않고 맞물리게 되어 있다. 손잡이는 엄지손가락 정도 폭의 밴드를 위아래 안쪽으로 구부려서 계량컵의 바깥면 제일 윗단과 아랫단에 용접하였고, 윗부분은 약간 눌려져서 잡기 편하고 자연스레 아래로 곡이 지어 있다. STS304 18-8, STAIN-LESS 주방 식기에 많이 사용하는 재질로 가볍고 관리하기 편하다. 착즙틀은 반으로 잘린 감귤류 과일들이 눌리고 비틀리기 쉽도록 위로 볼록한 반 구에 굵은 골이 산 봉우리 같이 이어지다가 평지에 가서는 약간 오목하게 씨앗을 거르면서 즙을 모을 수 있는 트렌치가 세로로 둘러 펼쳐지면서 설치되고 끝단에 가서는 원을 따라가며 볼록하게 골을 만들어서 컵에 얹히도록 되어있고, 손잡이, 주둥이 위치는 끊어져서 컵에 맞춰지도록 형태가 잡혀졌다. 그리고 마찰력을 키우기 위해서 계량컵 보다 투박하게 면처리가 처리되었다. 요즘 나오는 제품은 기본기능에만 더 충실하게 컵 부분의 용량이 적게, 그래서 납작하게 되어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나로서는 그 비율이 조금 어색하다.
이걸 가져다가 기본 기능인 레몬, 라임, 자몽 등을 짜서 주스나 차를 만들기도 하고, 요리에 쓴다. 그리고 컵은 따로 물 양을 계량할 때, 특히 카레나 수프 만들기, 라면 끓일 때 사용하고, 그다음으로는 식탁 차릴 때 파채를 담기도 하고, 과일이나 오이, 당근 같은 곁들여 먹을 가벼운 채소를 꽂아 올리기도 한다. 밀가루 계량에 더 요긴한 쓰임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250ml까지 눈금이 새겨 있는데 가득 담고 윗면을 처내면 300ml까지 잴 수 있다.
이 컵을 쓸 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점은 수도를 세게 틀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물을 담아도, 어떻게 담던 250ml가 담긴다는 점이다. 쓸때마다 ‘제법인데’ 하는 생각이 든다. 라면 3봉지를 끓인다면 550ml를 세 번 담으면 되는데, 6번을 가득 채워 붓고 마지막에 150ml를 천천히 재서 더하면 된다.
부엌 도구들 중에는 꼭 이런 것만 있지를 않고 r이 어릴 때 만들어 놓은 그림 그려진 세제통 물총도 세제통으로 그대로 쓰고 있고, 어딘가에서 만들어 온 풍경도 있고, 언제부터 썼는지 잘 기억 안 나는 국자, 집게 등을 담은 투명 플라스틱 통, 어른들이 반찬 주실 때 담아주신 그릇들도 있어서 어떤 취향이 드러나진 않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일이 있었음을 추적할 수 있다, 쌓여있는 이야기들을. 그래도, 아니면 그래서 어딘가 어설프게 산 물건은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바로 처리하는 것이 좋다, 우스꽝스러운 선택을 한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더 많은 시간이 지났을 때 나를 둘러싼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새로운 물건을 살 때는 이 레몬스퀴저가 내 기준이 된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시간을 내거나 고르고 고르지는 않지만 그만큼 이 기준이 튼튼하고 든든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