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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Nov 14. 2022

수줍은 엄마의 고백

<수상한 병원 리포트 4 >

어머님, 잠깐 병원에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여름, 중1 아들이 유도를 시작하고 몇 달 지난 어느 날 연습 도중에 발목을 삐끗했다고 연락이 왔다. 다음날 학교 끝나자마자 얼른 병원에 가보라고 보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퇴근해서 돌아오니 집 앞 정형외과 선생님이 다급히 나를 호출한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달려가 보니 아들의 종아리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주신다. 7세 때 찍은 사진과 비교해주시며 그때는 없었던 흰색 가루가 뼈 옆에 흐릿하게 생긴 것이 이상하다며 큰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겄다고 말씀하신다. 에고. 이건 무슨 일이지?



남편이 부랴부랴 집 근처 대학병원 정형외과에 예약을 한다. 아들을 데리고 가서 진료를 봤으나 별다른 소견이 없고 원인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왔다. 3개월 후 다시 엑스레이를 찍고 추적 관찰을 해보자 했고 3개월 후, 다시 가서 진찰을 받는다. 이번에도 별 다른 이상이 없다며 소아청소년과에 다시 연결하여 진료를 받으라 한다. 여기서는 피부 건염이나 기타 질병이 의심되니 정밀 피검사를 해보자고 한다. 결과를 들으러 가니 또 수치상 모두 정상이라고 피부과를 가보라고 한다. 피부과도 정상, 재활의학과를 가보라고 한다. 초음파까지는 해보고는 석회질이 혈관 옆에 붙어있긴 한데 진료 소견은 이상 없음, 원인은 모름. 그리고 신경 전문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를 다시 연결해준다. 이쯤 되니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다. 명세기 대학병원이고 이렇게 많은 진료과를 거쳐 검사를 했으면 원인을 밝혀내야 하는 거 아닌가. 또다시 별다른 원인도 진단명도 모른다는 의사에 말에.


그럼. 이 많은 의사가 이 많은
검사를 하고도 명확한 원인을
모른다는 건가요?



다시 고쳐 묻는다 "네. 잘 모르겠어요."의사가 답한다. 다시 묻는다. "그럼 저와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의사:   일단 살을 빼야 합니다. 고도비만인 상태라.
나    : 살을 빼면 나아지나요?
의사:  아니,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나   :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뭔지도 모르는 이 증상을 그냥 넋 놓고 지켜보고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건가요?
의사: 제가 S대 병원 유명 의사에게 진료의뢰서를 써드릴게요. 그쪽에 한번 가보세요.


아. 정말 고구마를 100개 정도 먹은 것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이렇게 큰 대학병원에 모든 진료과가 다 있는 서울시내의 큰 병원이 진단도 원인도 못 밝혀내고 환자를 무한루프로 돌리다니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이해도 안 되고 화가 날 지경이다. 돈도 돈이지만 없는 시간 쪼개 병원을 몇 번씩 들락거리게 만들더니 결국 돌아오는 대답이 "모르겠다"라니. 참으로 무책임하다.


다신 이 병원엔 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모든 의료기록과 영상을 챙겨 나온다. 아무래도 <수상한 병원>에 가야겠다. 지난번에 넌즈시 아들의 증상을 말씀드리고 원장님께 여쭤봤더니 얼른 데리고 오라는 말씀을 들은 터였다. 이번 주 토요일 오전 모든 서류를 챙겨 <수상한 병원>에 아들을 데리고 진찰을 받으러 간다. 원장님은 사정 얘기를 다 들으시고 기록을 살펴보시더니 엑스레이를 한번 더 찍자고 하신다. 잠시 후, 침 치료를 받는다고 누워있는데 원장님께서 툭 던지듯 말씀하신다.


원인을 찾아냈습니다.



 침 치료가 끝난 후, 나를 다시 진료실로 부르시더니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주시며 다시 한번 친절하게 설명해주신다.
" 발목이 안 좋아서 그래요. 허리에 디스크도 있고. 여기 허리 디스크 간격이 줄어든 거 보이시죠? 여기 발목에 골절도 있고. 발목이 안 좋으니 몸 안에서 스스로 버텨보려고 근육을 만들거나 석회질을 만들어내서 뼈를 튼튼하게 만드려고 애쓰는데 근육을 만드는 게 안되니 석회질을 만들어낸 거죠. 가장 약한 발목 부분부터. 발목이 안 좋으니 몸을 움직이는 게 힘들었을 거고.  못 움직이니 살이 더 찌게 되고 예민해지고 그랬을 거예요. 유도는 수명을 단축시키는 운동이니 절대 시키면 안 되고 수영을 시키세요. 살도 빼야 합니다"


와, 진짜 엄지 척이다. 대학병원의 그 많은 의사들이 못 알아낸 걸 이렇게 단박에 알아내시다니 정말 놀랍기만 하다. "고맙습니다." 몇 번 인사를 드리고 나온다.



치료받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침을 맞으면서 아프다고 꺅꺅 소리를 지르고 난리다. 간호사 선생님들이 여기저기서 잘 참고 있다고 칭찬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그나마 거부하지 않고 치료는 잘 받았나 보다. 아팠다고 죽는소리는 해도 다행히 중간에 뛰쳐나오진 않고 치료를 다 받고 힘든 표정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얼른 수고했다고 등을 토닥토닥해준다. 아픔을 잊게 밥 먹으러 서둘러 나간다. 늘 그렇듯 우리 집 애들은 밥이 보약이고 선물이다. 원장 샘이 살은 빼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으니 최대한 야채를 많이 먹고 저녁식사는 하지 않거나 샐러드로 대신하자고 다짐을 받아두고 맛있게 점심식사를 한다.



집에 들어와 뻐근해진 허리를 전기매트에 뜨끈하게 지지려고 눕는다. 아들도 철퍼덕 자리를 차지하고 따라 눕는다. 가만 생각해보니, 아무것도 모르고 살빼라고 유도시켰던 내가 참 무지했었다는 때 늦은 후회가 든다. 옆을 보니, 장난치고 싶어 입을 씰룩거리는 철부지 아들의 얼굴이 보인다. 잠깐 고민하다 용기내어 말을 건넨다.


엄마가 아들 발목 아픈 것도 모르고
유도하라고 해서 미안해.
엄마도 몰랐으니 용서해줄래?


아들은 대번에 큭큭 웃으며 "엄마 미안하니까 나 노트북 사줘"한다. 에고, 내가 철부지 아들한테 뭐라고 했나. " 지금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니? 엄마가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게임할 생각만 하고 노트 북사 달라는 아들이 어딨어?" 현실 모자의 맥락 없는 대화는 훈훈한 마무리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분노의 샤우팅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이고 또 다행이다.



애정표현이랍시고 재미없는 농담에 철부지 행동으로 속을 뒤집어 놓거나 늘 게임만 생각하는 사춘기 철부지 아들이지만 이제라도 원인을 찾아 다행이다. 엄마가 유도하라고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게 되어 또 한 번 다행이고 치료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어 그 또한 다행이다. 게다가 다음 입원에는 동행할 아들이 있어 마지막으로 또 다행이다.



결국 돌고 돌아 여기 <수상한 병원>에 다시 오게 되었다. 여기를 몰랐다면 지금도 난 또 미로 같은 대학병원의 어딘가에서 육두문자를 날리며 허망하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을 거다. <수상한 병원>을 소개해 준 친구에게 기분 좋게 밥 한번 사겠다고 얼른 문자부터 남겨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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