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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Oct 11. 2023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에 대하여

가을. 낙엽. 인생.

싱그러운 싹이 태어나

머뭇머뭇 세상에 머리를 내밀 때는

세상이 이렇게 크고 넓은지 차마 가늠하지 못했다.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채

한 곳에 뿌리를 박고

고개를 치켜들고

위로만 커갈 뿐이었다.


길고 가느라란 가지가 옆으로 뻗어나갈 때엔

여기저기 기웃거리느라 풍성한 이파리는커녕

여린 잎 하나 겨우 틔워내고는

또 다른 가지에 가지를 뻗어내느라 바빴지.


커다란 나무기둥은 묵직하게 버티는 듯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요망스러운 바람에도 흔들리고

느닷없는 번개에 가지가 꺾이곤 했다.


주렁주렁 열매가 달릴 때쯤엔

세상을 얻은 것처럼

충만함에 의기양양해지기도 지만.


어느새

아름드리 가지가 홀쭉해지더니

옆으로 옆으로 펼쳐냈던 이파리도 하나둘

물기를 뱉어내며

얄팍한 두께로 서로의 간격을 내어준다.


이윽고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고

메마른 바람과 한낮의 볕이

이파리의 남은 습기를 훔쳐가 

메마른 잎사귀가 되었다.


하늘하늘 공중을 갈지자로 휘청거리다

마침내 땅바닥에 뒹굴거리고.


긴 여름 태양을 그리워하듯

지난밤 별빛을 추억하듯

바스락바스락 들릴 듯 말 듯

떨리는 목소리로


지난여름 사납던 소나기에도

거세게 몰아치는 성난 폭풍에도

겹겹이 포개어져

험난한 시절을 함께 지낸 벗들을

애잔하게 불러내본다.


가을밤은 이렇게

뒹구는 이파리사이로

슬며시 머물다 홀연히 사라진다.


@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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