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사랑낭만

by 블루나잇

선미야, 발이 차갑다. 손도 시리고. 삶이 낭떠러지 같구나. 네가 찾아왔던 날에 나는 차마 내밀지 못한 마지막 손가락을 잘라서 머리맡에 간직해 두었지. 그것이 너를 다시 부를까 봐서, 내가 참 나쁘다는 건 너도 알고 있었잖니. 그렇게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가까이 두고 싶었던 마음을 너는 용서하지 못하겠지만. 밤새 흔들린다. 기세가 굳센 사신이 검은 옷을 휘감은 채 노여운 입김을 내쉬며 목을 조여오기 일쑤였다. 어떻게 우리가 남이 된단 말이냐.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하고 싶지도 않다. 하늘이 시퍼런 구름을 집어삼킨 뒤, 무섭고 끔찍한 밤이 벌어지면 발끝에 저며 드는 소름으로 절로 몸서리치다 졸도하듯 잠들었다. 삶은 죽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나. 선미야, 발이 너무 추워. 손의 마디부터 핏줄까지 전부 메말라서 이승에 다하지 못한 소원들을 떠나보내는 기분이 들곤 한다.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인기척 없이 떠나간다. 미안해, 미안하다 선미야. 버림받은 애들 가운데서 최후까지 버림으로 남은 자의 기분을 요즘 느끼는 것 같아. 불구덩이가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가 없나 보구나. 우리는 자꾸만 밀쳐지고 혹사당하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어서, 뿌리를 뽑아내려 애써도 종족 자체가 태초의 잘못임을 알아서. 멍청하게 허튼 마음만 먹지 말고 너라도 살아야지, 잘 살아야지 선미야.


책장이 흔쾌히 넘어가지 않아서, 아끼던 책을 찢어내던 날들이 있었다. 어딜 가나 나를 찾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분노가 아니라면, 원망이거나 서글픔일 수도 있었겠지. 머릿속이 온통 불안과 불면으로 가득해서 걸음이 눈 쌓인 늪지대를 걷는 것처럼 푹푹 빠지던 저녁에, 부러진 복숭아뼈를 되살려내지 못해 그대로 발목을 절단하던 그때의 우리들이. 나는 너무 불쌍해.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한탄하다 보면 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지겨운 밤을 애달파하는 모순. 잘려나간 발목들은 뜨거운 유리 구두를 신고 춤을 추고 있었어. 아마도 자유를 얻었나 봐,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일 뿐. 그래도 너는 살아야지 선미야. 빨간 유리구두가 네 육신을 가로막고 애처로운 눈빛을 띄우며 심장을 도려내는 마차에 너를 태우려고 해도 도망쳐야만 한단다. 머무를수록 고통은 배가 되겠지. 누군가는 투명한 보석 같은 눈물을 흘릴 것이고, 눈물은 그저 현혹. 너를 살게 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니까. 도망쳐, 얼음장같이 짓이겨진 발이 몸을 덧대고 각목을 닮은 날 선 손바닥이 우리를 움켜쥐어도 흔들리지 말거라.


배가 조금 고파서, 미음을 끓여 먹은 아침에도 나는 네 생각을 한다. 실제로 보았던 너, 우리 집 부엌에서 부추전을 부치던 너, 낡은 티브이를 두고 옅은 보조개를 드러내던 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촌스럽지만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내 꿈에 나오는 너. 이마 중앙에 총알이 꽂힌 채 삶과 죽음의 경계에 머무른다는 삼십 초 남짓의 시간에도 나는 너를 떠올린다.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서, 그런 방법을 알지 못해서 네가 그립다. 보고 싶다는 염치없는 마음을 갖는다. 그러다가도 곧 죽는 몸이구나, 어쩌면 이미 죽었는지도 모르지 중얼거리면 조금은 나아지는 것처럼. 내가 죽지 않아도 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믿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흐려지는 동공 앞으로 익숙한 색깔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너와 걸었던 공원, 자주 가던 시장 골목, 퉁퉁 부은 다리를 두드리며 잠시 쉬어갔던 낡은 벤치 그리고 너와 걸었던 공원, 낡은 벤치, 그다음엔......

우리가 살아있는 계절. 서로를 부볐던 날씨와 배경의 냄새.


삶, 사랑, 낭만 같은 것들을 싸잡아서 기억하려고.

마지막으로 보였던 것은 코가 조금 못나게 태어난 만득이 인형.

삐뚤어지고 모난 것들이 사실,

반듯하거나 평범하게 태어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실없는 농담을 지껄이면서.


선미야 나는 네가, 평범하게 살았으면.

어젯밤엔 뼈저린 외로움에 사경을 헤맸거나,

눈물로 한강을 채울 만큼 한 소쿠리 울어냈어도.

오늘은 오늘로 살아내야지 하며 담담하게 일어섰으면.

그렇게 남들처럼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사치 같은 생각을 어렴풋이 흘린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불러보고 싶구나, 선미야.

네 과거였던 아픈 나는 죽었으니, 네가 부디 평안으로 머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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