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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한 Oct 14. 2021

<키워드글쓰기 - 하현우_Vagabond>

https://www.youtube.com/watch?v=3kV1Oato3XI




‘비가 그쳤다. 이제는 태양이 보일테지.’


그의 말에 절로 귀가 기울여지고 마음이 가는 건 모두가 바랐던 희망이 언어로 표현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래전 가뭄이 덮쳤을 때 왕들은 하늘로부터 비가 내려지길 기도드렸다. 그러나 지금의 세대에는 비가 그치길 바라는 기도가 왕이 된 사람들이 기도하였던 시대였다.


높은 산봉우리들마저도 가라앉은 시대, 신이 인류를 쓸어버리기 위해 물을 이용했다고 생각될 정도의 기나긴 소나기는 계속되었다.


그렇게 연속된 꿈을 꾸는 건 오랜만이었다. 꿈의 마지막이었을까. 비가 그쳤다. 그때 찬란한 햇빛이 비치며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못 할 때, 서연이를 깨우는 태웅이었다.


“또 그 꿈이냐.”


보고 싶었지만, 보고싶지 않은 사람. 태웅이었다.


“왔어..”


옛날 시대에선 여자의 집에 남자가 드나들면 온소문이 온동네로 퍼질 게 뻔했다. 발 없는 말은 어느새 천리를 넘어 만리까지도, 이 별에서 가장 멀리라고 볼 수 있는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시간도 불과 1분도 걸리지 않는 시대였다. 빛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없었지만 그보다 못하게 인류는 빠르게 진화하고 있었다.


씻지 못한 얼굴로 깨재재한 그 얼굴로 태웅을 바라보는 서연. 태웅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오랜 친우이자, 영혼의 단짝과 같은 서연이 괴로워 하고 있는 사실. 그 이유에 자신이 어느 정도 기여를 했기에 가슴이 아플 뿐이다.


서연이 잊지 못하고 있는 남자. 그게 하필이면 태웅이 자신의 형인 태섭이라는 사실이 매우 못마땅하다. 너무 소중한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이 자신 모르게 사귀고 있었고 결혼까지도 약속할 땐 행복 반, 질투 반이었다. 그래도 행복이 더 컸다.


이제는 볼 수 없는 태섭이의 얼굴을 닮은 남자. 자신이 정말 좋아했던 남자. 그리고 사랑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살기 위해서는 태웅이를 봐야했고, 살기 위해서 태웅이를 만나지 말아야했다.


“오지말라니까..”

“안오면.. 그대로 계속 잠들어 버리게?”


뼈가 사뭇 치는 말이었다. 얼굴을 비볐는데 물기가 묻은 손, 눈물이었을까. 한밤중에 흘린 땀 때문이었을까.


“일년이 지났어.”


커텐을 거두자, 이미 중천에 떠 오른 햇빛이 검은 방안을 쓸어버릴 듯 몰아친다. 커텐을 걷는 태웅이의 뒷모습에서 태섭이가 나타나자 서연이는 또 입가에 절로 미소가 돋다가 다시 양꼬리가 내려간다.


“고작 일년인데.”


백년도 부족해 천년을 넘어, 영원을 약속했는데. 고작 일년 따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


태웅은 커텐을 치다말고 그대로 둔다. 2% 부족해 완성되지 않은 모습처럼..


“일어난거 봤으니가 깐다. 밥 차려놨으니까 먹어.”

“오늘이구나. 나도 갈래..”


믿겨지지 않는, 시간.


그가 떠난 시간.


자신을 만나러 오던 그날의 사고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뉴스에 보도된 그의 마지막 모습.


아이들을 구하러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은 평소에 태웅이가 알던 태섭이었고, 서연이가 사랑에 빠진 태섭이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잃고만 사랑이었다.


그가 살린 열 여섯 명의 사람들이 보내 온 편지. 그리고 네 명으로부터 걸려온 부재전화가 있다.


태웅은 먼저 신발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상태로 어딜가냐. 쉬어라.”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서연이 움직이다 실수로 틀어버린 티비.

태섭과 더불어 많은 별이 탄생했던 날을 기리는 1주기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태웅이 문을 열자, 태섭이 구한 마지막 생존자가 머뭇거리다 태웅과 눈이 마주한다. 태웅을 발견한 그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작고 크게 외치며 뛰어간다.


“어.. 잠시만..”


태섭은 그의 뒷모습을 그대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누구도.


그런데 왜 모두 벌을 받고 있는 걸까.


그때 문득 서연이 태섭을 등 뒤로부터 끌어안는다. 태웅은 당황한다. 가끔 자신을 태섭으로 착각한 서연이의 돌발행동들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거겠지..


“서연아..”

“오빠, 보고싶었어..”

“....”


집 앞까지는 같이 왔지만, 이런 모습들이 싫어서 들어오지 않은 선아가 팔짱을 끼고 이 모습을 아무말 없이 바라보았다.


태웅이는 선아와 마주친 눈을 보고 살짝 웃어 보였다. 선아도 못마땅하지만 아무 말 없이 그저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먼저 또박또박, 크게 울리는 걸음 소리를 내며 걸어간다.


“사랑해..”

“...”


걸음 소리가 멈춘다. 엘리베이터에 도착한건지. 아니면 사랑이란 말에 멈춘건지.

선아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선아를 바라보는 태웅.


태웅의 등을 태섭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서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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