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건, 내가 기록을 참 잘해놨다는 거, 그리고 기억력이 참 좋다는 거다.
나이가 들면서, "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지?", "방금 뭐 때문에 냉장고 문을 열었지?" 같은 일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울 아들 키울 때의 기억은 작은 것 하나도 다 기억이 나는 것 같다. 물론 몇몇 기억들은 왜곡되어 아름답게 포장된 것 같기도 하지만...
생후 11개월, 일상적인 규칙들이 늘어났고, 나름 잘 유지되었다.
다만, 지난달부터 시작된 "내가 할 거야 병(?)"이 진화해 여러 가지 면에서 말썽(?)을 일으켰다.
울 아들은 아침형(?)이라 항상 엄마, 아빠보다 일찍 일어나서 방을 나섰다. 거실에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 계셨고, 거실을 지나면 이모들이 자고 있는 방이 있었으니 항상 아침마다 굿모닝 인사를 받으며 방을 순회했던 것 같다.
아침 식사는 모두 바쁜 시간대라 외할머니 혹은 내가, 간이 거의 안된 이유식을 먹였는데, 식탁 옆에 설치해 둔 아기용 의자에 앉혀 함께 먹었고, 점심과 저녁도 한 자리에서 먹이는 습관을 들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가 할 거야 병(?)"이 발동하면, 어설픈 숟가락질로 인내심을 테스트해, 식사시간이 쉽지 않았다.
이유식을 먹인 후에는 이를 닦였다. 이때도 "내가 할 거야 병(?)" 때문에 아이 손에 칫솔을 쥐어주고 시작해야 했다. 세수를 시키고 나면, 아기 로션을 발라주었고, 밖에 나갈 때는 선크림도 바르는 루틴이 생겼다.
엄마, 아빠가 출근하는 날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출근 의식을 했고, 퇴근할 때까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들과 시간을 보냈다.
변비가 생기지 않도록 하루에 한 번 반드시 볼일을 보도록 유도했고, 성공하면 칭찬했다.
가능하면 낮잠을 억지로라도 재웠고, 나머지 시간은 식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놀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9시엔 잠자리에 들었다. 모든 식구들이 동참해서 9시엔 거실 불을 껐다.
자기 전 모유 수유를 하면서는 자장가를 불러주거나, 옛날이야기, 혹은 그날그날 있었던 일상 이야길 했다. 모유 수유가 끝나면 물 한 모금을 마시게 했고, 자리에 같이 누워 책을 읽어 줬다. 아이가 자다 깨면, 등을 토닥여 주거나 다리를 주물러 주면서 다시 자게끔 유도했다. 대부분의 날은 그것만으로도 다시 잠이 들었지만, 컨디션이 나쁘거나 하는 날엔 자다가 젖을 찾기도 했다. 그럴 때는 그냥 밤중 수유를 했다. 아직은 어려서, 완전히 잠에서 깨지 않도록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낮동안의 놀이는 너무 다양해졌다.
일단, 걷는 게 익숙하다 보니, 활동 반경도 늘어났고, 손, 발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모두 놀이가 되었다. 작은 공(볼풀공)을 손으로 던지기, 큰 공(비치볼)을 발로 차기, 미니 자동차 장난감 가지고 놀기, 자동차 타고 놀기, 자동차 밀면서 놀기, 숨바꼭질 놀이 등등.
축구는 생후 349일째부터 시작했는데, 거의 뛰는 수준으로 걷기 시작하니까 가능했던 놀이였다. 물론, 처음에는 헛발질로 넘어지는 게 80% 더니, 공을 찰 때는 발등으로 차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난 뒤부터는 제법 잘 찼다. 층간 소음 걱정으로 비치볼을 가지고 주로 놀았고, 아빠와도 할 수 있는 공놀이가 생겨 좋아했다.
책을 가지고 노는 일도 많아졌다. 밤에 자기 전 책 읽기는 보통 내가 선택해서 읽어줬었는데, 낮에 내가 없을 때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들에게 책을 갖고 가서 읽어달라고 했단다. 하지만, 어른들이 열심히 읽어주는 것에 집중해서 듣기보다는 이 책, 저 책, 갖고 오고 갖다 놓고 하는 게 재미있었는지, 아니면 어른들이 해달라는 대로 해 주는 게 재미있었던 건지, 책장 속 책을 다 끄집어내서 놀았다.
생후 360일째부터는 혼자 노는 일도 늘어났다. 구석진 곳에 숨어있는 일도 생겼다. 그래서 혼자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좋아하는 볼풀공도 넣어주었더니, 자주 혼자 들어가 놀았다. 멍 때리는 순간들도 자주 생겼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무슨 맘인 걸까?'
첫 돌이 가까워질수록,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점점 빨라졌고, 이전과 다르게 낯선 환경을 두려워하기보다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빨대 사용하는 법을 가르쳤더니 금세 따라 했고, 비슷한 또래의 형이나 누나들이 보이면, 가만히 지켜보다 그 행동을 따라 하기도 했다. 외부 식당에 딸린 작은 놀이방 같은 곳에서도 무리 없이 잘 놀았다. 다만, 몇 개월, 혹은 몇 살 더 많은 형아들의 거친(?) 행동들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거나 밀쳐지는 경우가 많아 조금 위험에 보이긴 했다.
아직은 아가여서 그랬는지, 반드시 해야 하는 루틴들도 놀이로 승화시키면 잘 따라 했다. 예를 들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물풀공을 텐트에 넣는 놀이(청소)를 시킨다거나 책장에 책을 꽂는 놀이(청소)를 시킨다거나.
또, "내가 할 거야 병(?)"을 잘 이용하면 하기 싫어하는 칫솔질과 세수를 쉽게 시킬 수 있었다. 아직은 말을 잘 못해 행동으로 보여주는 중이라, "OO이 칫솔로 내가 이 닦아야지"하면 쪼르르 달려와 칫솔을 달라고 했다.
"내가 할 거야 병(?)"은 생후 11개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내 육아일기 기록엔 이 현상을 "내가 할 거야 증후군"이라고 기록해 뒀는데, 사람들은 "내가 할 거야 병(?)"이라고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다들 한 번씩 겪는, 지극히 정상적인 발달사항이지만, 아이를 키우던 그 순간에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참 쉽지 않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