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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L Jun 12. 2023

독일에 오기 전 잘한 일 2

서핑

그래도 잘 그만뒀다고 생각한다.

도망은 반대방향으로 힘차게 가는 것이다. 힘차게 힘차게 힘차게


죽도록 달려서 도착한 곳은 내 고향 포항에 있는 신항만.



<미니 은퇴>


퇴사를 하고 한동안 집에서 푹 쉬었다.

현장만 가면 벌렁이던 심장이 평온을 조금 찾았다.

그리고 나에게 20대 은퇴선물을 주고 싶었다.


은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빨리 일에서 멀어져 연금 받으며 소소하게 마트에 가거나, 몸이 늙고 지쳤으니 건강을 유지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일까?


뉴리치는 겉만 번지르르한 은퇴를 위해 컨디션을 회복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는 것을 뒤로 미루는 대신, 인생 전체에 걸쳐 ‘미니 은퇴’를 고르게 배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나는 4시간만 일한다 中-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일'이라는 것과는 멀어져 세월아 네월아 하는 게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건강한 신체와 시간이 있을 때 작게나마 나에게 주는 선물이어야 된다. 다른 책에서는 이걸 '미니 은퇴'라고 표현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강원도 군 시절, 한 겨울에 새벽 순찰을 돌다 바다에 둥둥 떠있는 서퍼들을 보았는데 일출보다 멋있었다. 나는 일출 일몰처럼 마음을 쉽게 움직이는 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서퍼들을 보는 순간 나도 바닷속 자연과 함께 파도를 기다려보고 싶었다.

긴 군 생활 중 어느 하루의 일출


<서핑 코치>


스펀지 보드들

포항이 고향이기 때문에 바닷가에 서핑 샵이 있었다. 

기간이 지난 구인 포스터를 보고도 인스타 DM으로 연락해서 일하게 되었다.

처음에 나의 흰 피부를 보고 피부 먼저 태워야겠다고 했다ㅋㅋ


이후에 나는 강습 때 "바닷가에서 나보다 까맣게 탄 사람이 찌릿! 눈빛을 준다면 뭔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라고 장난스럽게 얘기한다. (실제로 서핑은 초보자들이 보드를 컨트롤하지 못하는데도 큰 파도를 잡으려고 라인에 들어오는 건 위험하다. 그래서 서퍼들이 눈빛을 보낼 때가 많다.)



<서핑 샵에서 일하면서 느낀 몇 가지들>



힘들게 강습 마무리하고도 힘이 넘친다.

- 일의 강도는 매우 힘들었다.


여름 철 휴가에 맞춰 우리는 주말을 항상 준비하고 주말이 되면 물에 4~5시간 동안 연속으로 있어야 했다.

그렇게 있다 보면 손이 다 불고 볼이 쪽 들어갈 정도로 살이 많이 빠진다. 실제로 한 시즌에 일했던 코치들은 살이 5~7kg 정도 빠졌다. 하지만 우리는 힘들어도 항상 파도를 보고 있다.

바다가 장판(호숫가처럼 잔잔해서 파도가 없을 때) 일 때는 용왕님에게 파도를 달라고 기도를 하고 폭풍이 몰아쳐서 바다가 뒤집어지면 저런 파도도 재밌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아주 깔끔하고 설레는 파도가 들어오는 날엔 3시간 일찍 출근해서 일출 파도를 즐긴다.




아침 강습만 해도 사람이 많다.

-다양한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다.


서핑 강습을 받기 위해 포항으로 전국 각지에서 내려온다. 그래서 다양한 성격, 직업, 상황들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다 보면 관심사나 요즘 고민들을 많이 듣게 된다. 대학생들을 주로 취업과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내가 20대 중반부터 겪어온 성장통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토닥여준다. 나를 보라고.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건축시공회사에서 퇴사하고 서핑코치로 일 하고 있다고. 수염도 기르고 피부도 태우고 하하.

직장인들은 그냥 쉬고 싶어서 왔는데 강도 높은 운동 하러 온 것 같다고 많이 한다. 그래서 나는 포항 고기 맛집을 추천해 준다. 필요하면 술집도.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경험을 위해서 많이 오신다. 물에서 하는 스포츠 특성상 자녀분과 같이 입수해야 된다고 말씀을 드린다. 처음에는 입수하기 싫다고 밖에서 보고만 있으면 안 되냐고 물어보지만 물속에 들어가면 바뀐다. 부모님들이 더 신나 한다.


나는 서핑코칭을 하면서 항상 물어본다. 이 바다에 왜 오셨냐고. 대부분 쉬려고 왔다고 하지만 한편에 무거운 짐들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파도를 타는 것도 좋지만 입수 후 무거운 짐들은 바닷가에 전부 내려놓고 가시라고 말씀드린다. 



- 바다의 힘, 자연을 절대로 무시하면 안 된다.


포항 신항만은 방파제가 있는데 물이 바닷가 쪽으로 흐르는 이안류가 존재한다. 그래서 코치들은 항상 이론 수업 때 안전을 강조한다. 이론 수업 이후에 자녀와 함께 입수하는 부모님들께 한번 더 일러둔다.

한 번은 아버지와 한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파도가 조금 있는 날에 서핑을 배우러 왔다.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제가 파도를 태워서 아버님 먼저 보내드리고 자녀분을 보낼 테니 같이 바다로 들어오셔야 됩니다."라고

하지만 아버지가 아이를 챙기지 않고 먼저 돌아오셨고 초등학생 아이가 아버지를 따라 들어오다가 이안류에 빨려 들어갔다. 나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퇴수 하라고 말한다음 아무 장비 없이 친구 쪽으로 다가갔다.(기본적으로 주변에 있는 서핑보드를 가지고 본인의 안전을 확보한 후에 구조해야 된다.)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몸이 먼저 가더라. 그리고 메인코치도 그것을 발견하고 같이 그 아이를 보드 위로 올렸다. 처음에 그 친구의 겨드랑이를 잡고 보드 위로 올렸는데 반대 작용으로 내가 바다 밑으로 쑥 들어가 버리더라. 처음 느껴보는 공포감이었다. 그리고 보드를 붙잡고 헤엄치고 나오려는데 이안류의 힘이 굉장히 강했다. 메인 코치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한참을 허우적거렸을 것이다. 

무사히 해변으로 나오고, 그 아이는 무서워 울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이안류로 들어간 그 아이의 표정이 생생하다. 퇴근 후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서핑코치로서 사람들에게 즐거움만 주면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내가 아무리 강조해도 실제 바다의 힘은 무시하면 안 된다. 바다는 항상 흐르고 있다.



<서핑과 인생의 닮은 점>


"서핑계에서 계속 많이 쓰는 말이, 똑같은 파도는 절대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좋은 파도를 고르는 것 자체도 선수들의 역량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지금 경기가 펼쳐지는 시바 현의 스바라사키 해변은 제가 몇 번 방문을 했었는데, 방문할 때 파도가 좋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항상 비슷한 상태였던 거 같은데 사실 선수들이 이런 상황을 불평을 하거나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두 선수가 똑같은 상황을 접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그 상황을 감안해서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주고 있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에서 최대한 열심히 해야 한다 하는 점이 인생이랑 닮은 점이 아닐까 합니다." 
                                                                         -도쿄 올림픽에서 송민 해설 中-

똑같은 파도는 절대 오지 않는다. 그것이 인생과 닮은 점이 아닐까.

정말 서핑을 해본 사람은 알지만 처음 테이크 오프(보드 위로 올라서는 동작)를 경험했을 때 파도가 밀어주는 느낌이 정말 좋다. 그 느낌은 항상 새롭다. 그래서 서퍼들은 새벽까지 나가 좋은 파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똑같은 파도는 오지 않기 때문에 기다리고 기다린 파도를 위해서 힘껏 패들링(팔로 보드를 나아가게 하는 동작)을 해서 기회를 잡으려고 한다. 조금이라도 패들링을 덜 하거나 많이 하게 되면 내 보드와 파도가 화합하지 못해 파도를 놓치게 된다. 인생도 똑같다.



나는 잊을 수 없는 여름을 기억하면서 Anri - Remember Summer days를 듣는다.

몽글몽글하게 피어오르는 바다 바람의 느낌과, 파도가 밀어주는 힘찬 느낌.


Remember Summer Days

夏が消えていく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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