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추억 쌓기
트로트가 인생의 낙이라는 엄마의 말에 언젠가 '아들이 차려준 작은 소품샵을 관리하는 게 인생의 낙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다. 우리 집에는 엄마처럼 예쁜 접시들과 크고 작은 소품들이 많은데 모두가 보면 좋을 것 같으니까.
나는 독일을 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P양 때문이다. 장거리 연애가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오래 교제해 왔지만, 정작 각자의 할 일들 때문에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퇴사도 했겠다, 오랜 시간 해보고 싶었던 서핑도 여름 내내 했겠다. 선뜻 독일로 가겠다고 얘기를 했다. 그래서 우린 앞으로 닥칠? 미래를 모른 체 한국에서 추억 쌓기 여행을 하게 되었다.
비자 때문에 잠깐 한국에 있었던 P양, 그리고 P양을 보기 위해서 영국에서 지내고 있는 P양의 절친 올리아가 한국 여행을 온다고 전해 들었다. 둘은 베를린에서 만난 대학 동기인데 정말 얘기를 많이 들었던 지라 빨리 만나보고 싶었다. P양과 올리아를 유럽도 아닌 한국에서 보게 된다니까 여행을 좀 더 풍요롭게 해 줄 자신이 있었다.
첫 번째 여행지는 바로 포항. 바닷가 주변 예쁜 카페에서 힐링도 하기로 했다. 포항역에 마중을 나가서 트렁크에 짐을 싣고 오랜만에 보는 P양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뒤따라 오는 올리아와 인사했다. 둘은 그전부터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P양은 조금 지쳐 보였고, 올리아는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뿜어내고 있었다. 항상 긍정적이고 호기심이 많다는 올리아와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자 자 일단 아이스아메리카노와 앙버터를 먹으면서 얘기해 보자고!
외국인은 잘 보지 못할 수도 있는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고 괜찮은 카페에 들렀다. 영어를 조금밖에 하지 못해서 P양이 중간 통역을 계속해주었다. 먼저 올리아에게 한국에 와서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동태를 잘 살폈다. 동시에 P양이 올리아와 여행을 하는 동안 힘든 건 없는지를.
포항으로 여행지를 결정한 것은 경주를 가기 위해서도 있지만, 올리아가 서핑을 해보고 싶어 했다. 많은 경험을 하고 싶어 하는 올리아에게 내가 서핑을 가르쳐주면 좋을 것 같아 카페에 나와서 신항만으로 달려갔다. 파도가 많이 없었지만 초보자가 적당히 라이딩을 하기에 좋은 파도가 가끔 들어왔다. P양은 조금 지친 기색으로 해변가에서 조금 쉬겠다고 했다. 이제 올리아와 나는 통역가가 없는 바다로 들어가야된다!
영어로 설명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타이밍에 맞추어서 같이 타면서 같이 감을 익혔다. 그러더니 한 순간에 벌떡 일어나서 파도를 곧 잘 타더라. 올리아에게 운동신경이 좋다며 이제 서퍼라고 부르겠다고 칭찬을 하니 한동안 물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ㅋㅋㅋ
물놀이를 마치고 우리는 횟집에 갔다. 평소에도 자주 가던 횟집이라 아주머니가 서비스를 많이 주셨다. 여긴 날씨만 좋다면 노을이 지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매일 보는 노을이었지만 언제나 마음 한편이 간지러워지면서 설렌다.
혹시나 포항에서 서핑을 하고 싶어 신항만으로 간다면 2곳에 가보기를 추천한다.
*서프홀릭은 내가 일한 샵이고, 횟집은 지역 주민들이기 때문에 많이 팔아드리고 싶다.
여행을 하면서 계속 느낀 것이지만 올리아는 정말 도전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거침없는 젓가락질로 회를 곧 잘 먹었고 나도 못 먹는 성게를 오독오독 잘 먹었다. 올리아의 표정이 썩 좋지 않을 때도 있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먹어봐야지 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때가 많았다. 나도 옛날에는 저런 힘이 있었던 것 같은데. 모든 것에 흥미를 두고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해보는 것. 그러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니까. 이제는 그 깨달음이 무뎌진 느낌이다. 그래서 이렇게 글로 적고, 사진으로 기록하려고 노력한다.
경주는 내 고향이다. 사실 경상도로 오라고 내가 추천을 했다. 경주와 포항여행을 내가 직접 가본 곳으로 데리고 갈 수 있으니까! 처음부터 황리단길에 데려가 이리저리 사람에게 치이는 여행의 느낌은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를 선택했다. 올리아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런 한국의 옛날 수도에서 지은 역사 깊은 곳을 갈 거야라고 넌지시 소스만 줘도 엄청난 흥미를 가졌다.
날씨가 정말 좋았다. 첨성대 주변을 걸으면서 P양이 한참을 설명한 뒤에야 우리는 황리단길 카페로 갔다.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많고 한국적인 건물로 잘 꾸며놓았기 때문에 경주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인다. (물론 경주사람들도 가지만 주말엔 가지 않는다.)
도착 후 배가 고파져서 떡볶이를 먹자고 했다. 물론 올리아에게 가장 먼저 물어본다. 떡볶이라는 음식을 먹으러 갈 건데 정말 매워. 그래도 괜찮겠어? 올리아는 YES다. 항상.
몰랐는데 올리아는 나와 P양보다 매운 걸 더 잘 먹는다 ㅋㅋ 이후에 알았지만 술도 더 잘 먹는다.
우아하지만 강한 우크라이나 여자다.
경주에서의 여유로운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의 일정은 조금 빡빡했는데, 올리아가 미리 알아본 곳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부산의 자갈치 시장과 용궁사, 김천문화마을을 꼭 가고 싶어 했다. 그리고 바닷가가 있으니 수영을 꼭 하고 싶어 했다. (역시 지치지 않는 체력의 소유자)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부산을 가게 되면 꼭 데려가는 카페가 있다. 가구 쇼룸과 카페가 함께 있는 곳이어서 카페에 가려면 1층에 있는 쇼룸을 먼저 거쳐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가야 된다. 카페를 가기 전 다녀와도 되지만 카페 옥상에서 바닷가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맛 좋은 커피를 한 잔 한 다음 쇼룸을 구경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올리아의 귀국날이 다가오게 되면서 우리는 부산에서 인천으로 가야 했다. 롯데월드를 다녀와서 저녁 늦게 빨래까지 하는 바람에 늦게 잔 우리는 숙소에서 푹 쉬고 싶었지만 올리아가 뿜어내는 힘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출을 보기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용궁사에서 한동안 있다가, 입수를 해야겠다는 올리아를 데리고 바닷가로 갔다. P양과 나는 힘들어서 그냥 해변가에 있는다고 했다가 올리아가 삐져서 고생을 좀 했다 ㅎㅎ.. 다음엔 같이 수영도 하고 서핑도 하자 올리아!
장거리 운전을 하고 마침내 도착한 서울. 사실 서울과 인천은 거리가 조금 있지만 올리아는 그런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가고 싶은 곳을 모두 들리기로 했다. 서울에 있는 청계천을 가고 싶어 했는데 한적한 지방에서 주차하다가 서울 중심지에서 주차를 하려니 지옥이었다. P양과 올리아를 내려주고 주차공간을 한참을 찾다가 마침 유료 주차장에 겨우 차를 밀어 넣고 나왔다. 사실 이때 혼자 걸으면서 힐링을 좀 했다.. 하하
청계천에는 한국을 알리는 문화 행사 같은 걸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각자가 마음에 가장 담아두고 있는 한 단어를 한글로 써보는 공간이 있었다. P양은 마음의 안정, 올리아는 행복. P양이 적은 마음의 안정이라는 것이 내가 도와줄 수는 없는 것일까 잠깐 고민했다. 혹은 나로 인해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다음날 출국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이태원 작은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기로 했다. 반짝이는 남산타워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한참을 얘기했다. 물론 통역가 P양이 고생을 많이 했고. 그렇게 하루가 마무리되고 우리는 아쉬운 마음에 숙소에서 남은 폴라로이드 필름을 모두 사용하고 글을 적었다.
올리아를 공항까지 배웅해 주고 유럽에서 한번 더 보자는 약속과 함께 헤어졌다. 보낼 때 아쉬운 마음과 조금 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P양과 인천대교를 지나면서 올리아와의 여행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우리가 힘이 넘치는 사람들은 아니잖아.
그래서 조금 놓치는 부분들이 있는 것도 있지 않을까?"
P양의 말이 맞다.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흐르고 있는데 우리는 가속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악셀을 떼고 서서히 속도가 점점 줄어드는 건 잘 느낄 수 없다. 올리아가 우리들의 텐션에 풀악셀을 한번 밟아주면서 우리는 속도감을 느꼈고, 더 멀리 가고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독일에서는 조금 더 힘내보자"
이번 여행은 20대 후반에 느낄 수 있는 무덤덤함과 무뎌짐에 생기를 잃어버린 나에게서 에너지를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