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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L Jun 12. 2023

독일에 오기 전 잘한 일 1

퇴사

미생 대사 중

취준 할 때


놀고 싶은 마음과 공부해야 되는 마음 반반을

미생 드라마 보기로 타협했었다.




미생 오 차장님이 장그레 사원에게 했던 말.


내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적절한 대사이기에 플래너에 적어놨다.





"기회를 줘? 기회에도 자격이 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이 빌딩 로비 하나를 밝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는지 알아?"








<낮은 자존감, 성급한 결정>


취업스펙을 쌓으면서 구직 사이트 공고에 서류를 넣으니 연락이 도저히 오지 않았다.

심지어 4명 규모의 작은 회사들조차도.


그럼 내 스펙이 너무나도 부족했던 탓이었을까?

아니었던 것 같다. 단지 취업하는 방법을 몰랐을 뿐.

스펙은 인서울 4년제, 공대, ROTC 중위 전역, 건축 기사, 건축산업기사, OPic, 컴활 2.

실제로 그린 연습 도면

놀지 않았다. 단지 내 자존감이 바닥을 찍었고 아무 회사나 들어가야겠다는 조급함이 있었다.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아버지께서 지인분의 회사에 면접을 잡아주셨다.

면접을 보겠다고 흔쾌히 승낙했고 오는 3월부터 건축감리 회사에 출근했다.



<이직을 결심한 n가지 상황>


1. 배울 것이 없는 회사

나는 어떤 알바를 하더라도 일이나 사람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회사에 취직을 하면 커리어라는 것이 생긴다. 이 과정에서 잘못된 결정을 하거나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있는 사람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회사에서 이직을 결심한 이유가 많지만 그중에 3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상사분들끼리 주먹다짐하는 상황도 봄(하루 일과가 네 편 내 편 가르기)

일하는 프로세스가 체계적으로 잡히지 않음

쿠팡 물 주문을 자꾸 나한테 물어봄(감리 회사는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 많다)



2. 주변 친구들의 상황

친구들이 취업시기가 비슷한 만큼 어디에 취업했는지가 가장 큰 관심사다. 나는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와서 취업시기가 조금 늦어서 다들 내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했다.

그때 나는 회사에 취업을 했다고 말했고 친구들은 어디인지 캐물어봤다. 나는 00 감리회사라고 하였고 친구들은 대놓고 인터넷에 검색을 했다. (기분 나쁘진 않음. 친하니까.) 친구들은 포털사이트에 검색해도 잘 나오지 않는 회사를 처음 보는지 적지 않아 당황해했고 눈치 빠른 나는 친구들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이 부분이 제일 힘들었다)


또 오랜만에 학교 근처에 술집에 갔는데 졸업생들끼리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 여자후배가 술에 조금 취했지만 또렷하게 내 친구에게 물었다.

"오빠 친구 중에 그 00 전자 다니는 분 여자친구 있어요? 없으면 소개 좀 시켜줘요."

술자리에서 이런 얘기가 오가는 걸 나는 몰랐다.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게 힘들었었던 것 같다.


맑은 날 현장 타워크레인


<이직 성공, 그리고 퇴사>


많은 좌절과 성취 그리고 친구들의 응원 덕분에 나는 이직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이직할 때 친구가 해줬던 말은 아직도 힘이 난다.

롯0 건설 면접에서 떨어졌을 때 크게 낙심해서 친구들에게 나는 대기업은 못 가나 봐라고 얘기를 했다.

한 친구가 "그 껌 파는 회사 가서 뭐 하려고, 그런 회사 너가 가기 아까워"라고.


너도 나도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기업이지만 그렇게 얘기해 준 게 나는 지금도 너무 고맙다.


나는 목표로 했던 시공순위 20위권 회사에 취직하기를 성공했다.

양산 현장으로 발령이 났고 터파기부터 처음 들어가는 현장이라 신입사원에게는 너무나도 좋은 조건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싹싹하고 패기 넘치는 신입사원의 모습은 얼마 가지 못했다.

무전으로 박살나기 전

공사팀은 나 포함 총 3명이었는데 차장, 신입 주임, 그리고 나 이렇게 구성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공사 초기에 가설사무실, 화장실, 부지 정리 신입 주임과 나 둘이서 모든 것을 다 했다.

알고 보니 작업반장이 해야 되는 일까지 하고 있어서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괜찮았다.


하지만 정작 힘든 것은 공기가 조금 진행되고 견딜 수 없는 무게감이었다.

그 무게감은 3가지에서 왔다.


첫 현장이라 잘 모른다. 그래서 내가 찾아볼 만큼 찾아가서 모르는 부분은 알려달라고 요청했다.(회사가 나에게 일을 가르쳐주는 곳은 아니라는 것은 안다.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내 능력을 팔아 합당한 월급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모르면 내가 찾아봐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결정에 따른 공사금액 변동(예를 들어 레미콘 1대를 더 주문하면 50만원의 손해가 발생한다. 그리고 발주를 굉장히 많이 넣어야 한다.)

그리고 컨펌 받으려고 차장에게 보고하면 "콘크리트 물량 틀리면 뒤진다"라고 겁을 주고 잘 모르겠다 알려달라고 하면 "모르면 맞아야지" 라는 차장의 답변.


그래서 4개월 만에 나왔다. 아니 4개월이나 다녔다. 버텼다.

기성세대들이 "이래서 젊은이들은 안된다"라고 말하는 것과 내가 여기까지 오려고 했던 노력들이 억울해서라도 버텨야겠다.라고 생각했지만


현장에 나가면 내 결정이 맞는지 틀린지 몰라 부담으로 버뀌어 심장이 쿵쾅거렸고 심지어 퇴근 후에도 차장과 같이 숙소생활을 하다 보니 나에게는 진정한 퇴근이 없었다.


지금에서야 이 글을 쓰면서 많이 내려놓았지만 아직도 회식자리 때 들었던 말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회식자리에서 모두가 있는데 차장이 다 들으라고 소장에게 했던 말이 있다.

"이 새끼 뺨 한 대 때려도 돼요? 아니 진짜로 ㅋㅋ"


나는 더 이상 표정 관리가 안 됐고 울음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신임 주임이 나를 잘 토닥여 줬지만 회식이 끝난 후 그렇게 표정관리를 못하면 너만 손해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해줬다.


그 이후로 일이 더 많아진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제일 만만하고 제일 바보니까.

오 이런 것도 알아?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 쉬는 날까지 도면을 보고 현장에서 작업반장들에게 잘 보여서 얻은 정보로 현장에서 날라다닌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했는데 더 이상은 안 되겠더라.


그래도 잘 그만뒀다고 생각한다.

도망은 반대방향으로 힘차게 가는 것이다. 힘차게 힘차게 힘차게


죽도록 달려서 도착한 곳은 내 고향 포항에 있는 신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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