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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Nov 02. 2018

불안이 나를 먹어버릴 때

평온을 찾는 마음의 길




가끔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최대치의 슬픔은 무엇일지 가늠해본다. 그것은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달라졌는데, 아마 그때마다 소중한 무언가 새로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운명보다는 결정에 가깝다. 하지만 선택 이후에는 사랑에 의존한다. 사랑을 결정하는 동시에 내 존재를 쥐고 흔들 힘을 내준다. 영화 속 영웅이나 킬러에게 가족, 곧 사랑이란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적에게 협박의 빌미를 주는 셈이다. 사랑이란 얼마나 불안하고 위협적인가. 나를 한방에 무너뜨릴 수 있는 것들을 너무 많이 만들어 놓았다. 사랑이란 맨살을 드러내는 것일까. 마치 여긴 내 약점이고, 이곳은 급소라고 떠드는 것 같다.



이쯤이면 눈치챘겠지만 불안이야말로 나의 오랜 약점이다. 엄마 심부름으로 총총 뛰며 혼자 가게에 다녀오는 길에, 일곱 살의 나는 이따금 상상했다. 대문을 열었을 때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면 어쩌지? 그 나이에 떠올려 볼 수 있는 끔찍한 광경을 몇 가지로 돌려 보았다. 그럼 나는 무엇을 먼저 해야할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다가 감당 못할 슬픔에 목구멍이 콱 막히곤 했다. 정직하게 돌아보자면 그건 일종의 유희이기도 했다. 불안과 슬픔, 몹쓸 상상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이 상상이 현실이 될까봐 도리질을 하는 것까지. 머리를 탁탁 쳐야만 생각들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서 스스로 내리치던 때도 있었다. 그것이 자해가 될 수 있다는 짐작도 못했다. 타는 갈증에 허겁지겁 물을 마시는 것처럼, 그 순간의 내겐 다급한 조치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잃을까봐 두려웠다. 거절 당하는 것도 무서웠다. 마음이 돌아서는 기류를 감각하면 불안은 더 심해졌다. 그리고 그런 예상은 꼭 들어맞았다. 연애를 하면 항상 불길한 끝을 예감했다.

'너와 끝까지 간다면 나는 불행해지겠구나...'

나는 행복을 찾기 보다 불행을 피하려는 욕망이 항상 더 컸다. 어떤 조짐에 민감했고 자꾸 불행의 냄새를 맡았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게 손톱 조각처럼 작아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를 극복해야 사랑이라 믿었다. 그렇게 상처 받고 회복하며 나름대로 성장했다.



조금도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정말 있긴 있었다. 행복을 보장할 순 없어도 이 사람과 함께라면 불운한 일들도 웃으며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논리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안정감. 얼굴만 봐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 제자리를 찾았다는 확신은 지금도 여전하다. 나에게 남편은 오래 입어온 단정한 옷 같다. 앞서 언급한 사랑, 운명, 결정이며 의존, 안정 이 모두가 하나로 물화된 것 같은 존재.



하지만 이제는 다른 종류의 불안이 고개를 내밀었다. 다시 일곱 살의 나로 돌아가 내 가족을 다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행여 징후가 될까 입에 담을 수도, 쓸 수도 없는 무섭고 지리한 망상들. 이미 그런 일을 겪은 분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너무 부끄럽다. 무엇보다, 여기서 좀 벗어나고 싶다. 사실은 그래서 쓰는 글이다.



내 불안의 뿌리는 아마 부모님일 것이다. 엄마는 딸들에게 걱정어린 말을 자주 하는 편인데, 걱정이란 대개 불안한 미래를 보려 하는 데서 시작된다. 현재 이 일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을지 예측하고 그 중 가장 안 좋은 것을 골라 대비하려는 태도랄까. 아빠는 내가 어릴 때부터 종말론자였다. 아빠의 발화 중 최소 절반은 인류 멸망에 대한 이야기일 거다. 수십 번 싸우면서 이제는 일종의 신념이자 취미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세계 각지에 고루 존재하겠지.



그렇다면 내 부모의 불안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얼마 전 소설을 읽다가 주인공을 걱정하는 그의 부모를 보며 답이 떠올랐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 원망스러운 가계의 흐름은 분하게도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다. 부모는 나를 사랑해서 불안했다. 그래, 사랑.

뒤이어 불현듯 마음이 쿵 떨어졌다. 눈앞을 하얗게 만드는 진실.


불안은 나를 보호했다.


‘부모의 불안은 자녀를 지키는구나.’



크게 다쳐 입원해본 적도, 비운의 사고라 불릴 일도, 수술할 만큼 아픈 적도 없었다. 이것은 생각보다 대단한 행운이다. 그 기반에는 나의 예측 가능한 미래 중 안 좋은 것만 골라 예방해준 부모님의 불안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불안하니까 한 번 더 당부하고, 환경을 더 보완하고, 어떤 시도는 차단하기도 하면서, 또 간절히 기도하고 바라면서 그것을 내쫓았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불길한 상상 분야의 유망주가 되었지만 어쨌든 큰 탈 없이 안전하게 자랐다. 어릴 적 기억이 이를 증명할 장면을 사진처럼 보여주었다. 조용한 카페였고 훌쩍거릴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이상하게도 눈물이 멎지 않았다. 매일 손주가 보고싶다는 말은 결국 나를 향한 그리움이라는 걸 알면서 모른 체 했었다. 부모란 끝없이 그리워 하는 사람일까. 뒤늦게 두 분의 걱정과 불안을 긍정하고 받아들였다.




자, 이제 냉정히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사랑에 기인한 행동은 전부 옳을까? 부모에게 들었던 지나친 걱정들을 내 아이에게 쏟아주는 것은? 온당치 않다. 불안은 고스란히 다음 대에 넘어간다. 우선은 나부터가 이렇게 잠식되며 살기가 싫다. 나는 더 싸워야 한다.



먹구름 같고 블랙홀 같기도 한 두려움을 응시해본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까?

'그 일이 벌어지면 난 끝장이야'에서 그 '끝장'은 무엇일까? 이별이 두려운가. 놀랍게도 모든 인류가 매일 이별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이별한다. 이것은 필연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불안 속에 쭈그려 잠식되지 말고 팽팽하게 살아서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는 게 맞지 않을까? 이제는 후회 없이 사는 일에 더 에너지를 들여야 할 때. 불안의 반작용으로 생의 의지를 더 일으켜본다.



어쩌면 나는 스스로 무너져내릴 것이 불안할 수 있다. 감정과 정신이 받을 타격이 두려울 지도 모른다. 지옥 같은 시간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조용히 되새겨본다. 나는 불안에 종속될수록 더욱 간절하게 회복을 믿었다. 소망을 절박하게 휘어잡는다. 죽지 않는 이상, 나의 속도에 맞게 일어나 끝내 회복할 것이다. 무결한 심신을 원하는 게 아니다. 흉터를 여러 개 가진, 위로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신을 믿는다. 자신을 거절할 자유를 나눠주는 신. 그에게는 희망 없는 곳에서 선한 결과를 이룰 능력이 있다. 처절하게 상처 받으면서도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무수한 거절과 모욕에도 포기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눈물을 모아도 그의 슬픔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신의 슬픔은 내게 소망이 된다.

우리가 서로 닮은 것을 아는 위안.



두려움이 깊이 내려가 소멸한다. 폭풍은 지나가고 날숨에 몸을 이완한다. 괜찮아. 다독이며 일어난다. 마음에 근섬유 같은 힘을 한 줄씩 새긴다.

다음은 이번보다 좀 더 쉽게 이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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