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하얀 소파를 샀을까?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by 김보아


12년 전인가? 이사를 하면서 가구를 사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우연히 정말 맘에 드는 소파를 발견하였다. 마침 그 숍(shop)이 이전하면서 가구들을 정리하던 중이라 금액도 매우 합리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마음에 들어온 하얀색 가죽소파......

"며칠만 고민하고 다시 올게요."

젊은 여자 사장님이 그러라 배웅을 하셨다.


"애 둘을 키우면서 하얀색 소파라니, 가당키나 하니?"

"내 친구는 하얀 소파 샀다가 1년 쓰고 그냥 버렸어"

"매일 클리너로 가죽 닦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지 뭐"


나의 주변에는 어쩜 이리 비슷한 인간들만 있는지, 하얀 소파를 향한 나의 용기 있는 도전에 박수를 보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결국 나는 나의 고집대로 하얀 가죽 소파를 우리 집 거실로 당당하게 모시게 되었다. 사봐야 아는 거지, 써봐야 아는 거지 남의 말만 듣고 어떻게 알아...

그 날 이후로 우리 집 아이들은 정말 발을 열심히 닦아야 했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시커먼 발로 소파 위에서 펄쩍펄쩍 뛰다간 곧장 욕실로 끌려가 온갖 잔소리를 들었다.

"너 이렇게 더러운 발로 소파를 겅중겅중 밟으면 어떻게 되겠어?"

"더러워지지... "

"그럼, 그러면 돼? 안 돼?"

"안 돼... 근데 예전에는 괜찮았잖아"

"이 소파는 하얀색이잖아"

"그럼 왜 하얀색을 샀어?"


얼마 후에 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놀러 갔다. 그 집도 소파가 하얀색이었는데 그 집 소파는 아예 얇은 천을 덮고 있었다. 어디서 다가올지 모르는 오염으로부터의 공격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다리가 부러진 의자는 더 이상 의자가 아니다. 의자에 앉을 수 없다면 그건 더 이상 의자가 아니듯, 편히 앉거나 기대어 쉴 수 없다면 그건 더 이상 소파가 아니다. 나는 소파를 소유하고 있지만 소파를 소유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소파의 주인이 아니었던 거다. 그럼 그 소파가 나의 주인인가? 내가 소파를 모시고 있으니 소파가 나의 주인인 듯도 했다. 소파는 "소파"로 만들어졌는데 "소파"가 아니었다. 마치 거실 콘솔 위에 놓여있는 장식품처럼 바라보기에 좋은, 나의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거대한 전시품 같았다.


앉을 수 없는 의자는 더 이상 의자가 아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중에는 또 그런 것이 있었다. 아니 사실 지금도 가지고 있다. 세일이라 찾아간 쇼핑몰에서 어여쁜 청바지가 눈에 쏙 들어왔다. 그런데 나에게 맞는 사이즈는 모두 팔리고 더 작은 사이즈만 남아있었다. 게다가 디자인도 슬림핏(slim fit)이라니.

'뭐 어차피 다이어트해서 살 뺄 거니까, 곧 입을 수 있을 거야. 엄청 싸다. 사자!'

나는 결국 그 바지를 한 번도 못 입었다. 청바지는 사람에게 입혀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사람에게 입혀지지 않고 옷장 안에서 생을 마친다면 그건 청바지인가? 나는 그 청바지를 가지고 있으나 역시 그 청바지의 주인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청바지는 안 그래도 비좁은 옷장을 차지하며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존재로 철저히 소외되어 있었고 나 역시도 청바지로부터 소외되었다. 그 후로 나는 파격 세일이라는 이유로 유혹을 당할 때마다 생각한다. 내년에도 세일은 하고 내년에는 더 좋은 제품이 출시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안 산다고 큰 일 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다음 해에도 또 세일은 한다. 지금 안 사도 괜찮다.


열심히 책을 읽지만 책의 내용과 나의 삶이 전혀 상관이 없다면 나는 책을 읽은 것인가? 그 책의 내용은 마치 옷장 안에 청바지처럼 내가 알고는 있지만 전혀 상관이 없는, 나무를 원재료로 하는 종이라는 물질과 잉크의 결합체는 아닐까? 지식조차도 그렇게 소외되어 머물러 있을 수 있다. 아무리 비싼 만년필도 서랍 안에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열심히 종이 위를 내달려야 만년필이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읽는 내내 불편함을 준다. 그리고 마음에 죄책감을 갖게 했다. 그러나 소유가 인간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나'라면, 그것들이 사라져 버리고 난 후의 '나'는 무엇일까?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집요하게도 존재로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소유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것이 존재할 때, 즉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생산적으로 활용될 때, 살아있는 관계로서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행복감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존재론적인 방식으로의 삶이 아닐까?


지금도 12년 전에 구입한 그 하얀 소파는 나의 거실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천을 덮어 놓았던 지인의 집을 다녀온 후, 나 역시 보이지 않는 천으로 소파를 가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의 천을 거둬버리자' 결심했다.

때가 타면 좀 타는 대로, 더러운 것이 묻으면 좀 묻는 대로 편하게 쉬고 눕고 기대고 휴식하면서 소파의 주인으로서 시간을 보냈다. 이젠 하얀색이라기보다는 연그레이 정도가 되었다. 언듯 봐도 세월의 흔적이 분명하게 보인다. 그래도 앞으로 몇 년은 끄떡없을 것 같다.



인간은 자유할 때 가장 행복하다. 아무리 가진 게 많아도 그것들 때문에 자유를 잃으면 기쁨은 사라진다.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잠시 머물다 스쳐 지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행의 이유(김영하 저)에서 작가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고 하였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감옥처럼 느껴지는 고정된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자유할 때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찾기 위해서 인가보다. 그런데 만약 인생 전체가 길고 긴 여행이라면......


에리히 프롬은 막스 훈거지를 인용하면서 존재적 실존양식을 설명하였다. 푸른색 유리가 푸르게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푸른색을 제외한 모든 색을 흡수하고 푸른색만은 통과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부르는 푸른 유리는 푸른색을 그 안에 품고 있지 않고 방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아니라 나를 통해 세상으로 발산되고 있는 그것일지도 모른다. 머물러 안주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살아 움직여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 그것이 결국 마지막에 우리의 삶에 남겨질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