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승전>과 타자의 존재
조선시대의 이야기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50년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오대산에서 글 읽던 한 선비는 나이 여든이 된 한 노승을 만난다. 야위었지만 민첩하고 슬기로워 총기가 있었고, 그 선비의 글 읽는 소리를 좋아했다.
어느 날은 노승이, 오늘은 자신의 오랜 스승의 제삿날이어서 그날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날 밤 구슬픈 곡소리에 의아하던 선비는 다음날 아침 그 이유를 묻는데, 뜻밖의 사연을 듣는다.
사실 그 노승은 일본인이었고 왜란 때 우리나라를 침탈하러 온 검객이었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전국에서 뛰어난 검객 5만명을 모집했고 그 중 3만을, 1만을, 3천명을 추린다.
노승은 그 3천명 중 하나로 조선 땅을 밟게 된다.
추풍낙엽처럼 살생을 저지르며 두만강 근처 육진까지 다다르던 특별부대는 갑자기 한 바위에 도롱이를 입은 사람 하나가 앉아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삼천명의 특별 부대는 그에게 총알을 퍼부었지만 그는 오로지 칼로 모든 총알을 튕겨내는 화려한 검술을 보여준다. 이후 몸을 솟구쳤다가 새처럼 내려와 두 사람을 제외한 특별부대 모두를 베었다.
그 사람은 살아남은 둘을 차마 죽일 수 없어 자신을 따르겠느냐고 제의한다. 수년 간을 따라다니며 왜인 둘은 그의 검술을 모두 습득하고,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고 살아간다.
십년 후 노닐러 나가려던 어느날 스승이 몸을 구부려 짚신을 맬 때, 제자 둘 중 한 사람이 칼을 빼고 스승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서는, 남은 한 왜인에게 드디어 원수를 갚았다며 본국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남은 한 왜인은 너무 놀라고 경악스러운 나머지 스승을 벤 왜인을 그 자리에서 베었다.
하루아침에 스승을 잃고, 유일한 동포를 잃은 왜인은 결국 본국 일본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조선에 남아 있기도 어려운 처지가 된다.
동해에 빠져 죽을 시도를 하지만 큰 고기떼의 싸움으로 해안에 밀려와 목숨을 부지한다.
이후 오대산에 40년째 살고 있는 이가
선비가 만난 바로 그 노승이었던 것이다.
이제 남은 여생이 얼마 없으니 숨길 것도 없다며 편안히 웃던 노승은 그 다음날 종적을 감춘다.
이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우선,
1. 조선의 뛰어난 검객은 왜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활약했는지
2. 제자로 거둔 왜인 하나가 배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갔음을 진정 몰랐거나 예상할 수 없었는지
3. 마음으로 스승에 감복한 왜인의 국적을 무엇이라 해야 할지
등이다. 사실 1,2의 이유는 짐작이 가지만
나는 3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겪어보지 않았지만 전쟁이란 곧 민족이나 이념 등 인간이 만들어낸 지극한 허구 중 하나이다. 이러한 허구로 인간은 지금껏 많은 발전을 이루어 왔지만, 이로 인한 숱한 전쟁은 결국 인간의 본질을 흔들리게 만들어 왔다.
민족의 원수가 중요한가, 인간의 정이 중요한가하는 문제에는 우리가 쉽게 답을 할 수 있다.
그 누가 노승의 선택을 비난할 것인가.
그러나 이와 같은 한 개인의 사연을 알려주는 소설이 없다면, 누군가가 노승과 같은 선택을 한다고 해도 경계인이라 보며 그를 배척하지 않았을까.
노승이 여든이 넘은 나이에 다시 떠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어떤 공동체이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소외된 구성원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의 진정은 고려되지 않은 채, 출신이나 이력으로 판단하고 마는 씁쓸한 현실.
노승의 그런 뒷모습은 숨은 이인에 대한 신비로움이나 처참한 당시 전쟁에 대한 정신승리, 또는 휴머니즘적 가치 그 이상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 신광수, <검승전>
-임진왜란 이후 검객과 관련된 여러 야담이 있었고 이를 신광수라는 문인이 소설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광수(1712~1775)는 실제 이야기 발생 후 백년 뒤에 전해 듣고 이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