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아침 일찍 필라테스 강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근처 카페로 들어간다. 카페 내부는 출근길에 커피를 픽업하러 온 삼성맨들로 붐빈다. 자리를 잡고 앉는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 크림치즈 얹은 베이글을 한입 베어 문다. 불과 엊그제 삼성맨이었던 내가 삼성맨들을 신기한 듯 구경하며 커피를 마신다. 기분이 참으로 묘하다.
바로 옆 테이블에는 5명 남짓 되는 젊은 남자 직원들이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이 분들은 여유가 조금 있네. 상사가 출장 갔나 보다.’
회사 짬밥 5년이라고 상황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흰색 와이셔츠에 슈트 팬츠를 입은 그들이 몸에 지니고 있는 사원증을 얼핏 보니 눈에 익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나도 내 몸의 일부처럼 늘 지니고 다니던 네모난 그것. 한 10분쯤 흘렀을까. 높은 직급으로 보이는 한 신사가 유리문을 열고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자 직원 전원이 로봇처럼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순간 카페에 있는 모든 시선이 쏠렸다. 그들은 신사를 향해 모두 90도로 인사하더니 마시던 커피를 들고 쫓기듯 무리 지어 이내 카페를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도 하마터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설 뻔했다.
불과 얼마 전 나의 모습인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함께 또다시 묘한 기분이 든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여유로워 보인다 했어.’ 그들이 빠져나간 카페의 일부 공간이 휑하고 고요하다. 신사는 커피를 주문하고 주위를 멋쩍은 듯 둘러보더니 이내 나가버렸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카페는 금세 북적인다. 베이글을 마저 먹고 다음 수업을 준비하러 센터에 다시 들어갔다.
점심시간에 밥을 먹는 대신 운동을 하러 오는 회원님들이 더러 있다. 오후 12시에 온 나의 고객 역시 그러한 케이스다. 작은 체구에 쇼트커트 머리를 한 그녀는 삼성전자에서 디자이너로 일한다. 나도 삼성에서 디자이너였는데 어쩜 우리가 ‘필라테스 강사’와 ‘회원’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물론 그분은 나의 이력을 알리 만무하다.
“선생님 저 정말 회사 그만두고 싶어요. 어제 또 밤샜어요. 죽겠어요. 저희 회사가 지금 고과 시즌이거든요? 고과가 무엇이냐 하면요 블라블라...”
‘네 저도 그 마음 무엇인지 알아요’ 마음속으로 그분에게 대답한다. 삼성에서 디자이너라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 충분히 알고도 남는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업무량, 사람 스트레스, 그리고 삼성의 디자이너라는 알량한 부심이 뒤엉킨 채 마음속은 늘 전쟁 중이다. ‘관둬? 아니야. 내가 여기 어떻게 들어왔는데. 게다가 그만두고 내가 무얼 하겠어. 조금만 더 버텨보자. 아니다. 그냥 관둬?’의 무한 반복이다.
오전 8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저절로 눈이 떠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오늘의 스케줄을 확인하는 것이다. 실눈을 뜨고 핸드폰에 있는 오늘의 수업 스케줄을 확인한다. 오늘 첫 수업은 오후 늦게 있다. ‘유후~더 잘까?’ 이불속에서 부스럭 거리며 창문을 바라본다. 커튼 사이로 밝은 빛줄기가 방으로 들어온다. 무척 개운하다.
이불속에서 뭉그적거리다 이내 침대에서 내려와 이불을 정리한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연다. 창밖의 맑은 공기가 방 안으로 훅 들어온다. 아침 공기가 무척이나 상쾌하다. 방 문을 열고 방을 나오니 커피 향이 집안에 가득하다. 거실로 들어오니 토스트의 고소한 향과 커피 향이 어우러져 부엌에 가득 퍼져있다. 사과는 예쁘게 깎여 접시에 놓여있다. 계란 프라이를 부치고 계신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인다. 아버지는 우리 집 조식 담당이시다.
부모님과 함께 식탁에 놓인 빵과 계란을 먹으며 여유롭게 아메리카노를 음미한다. 코끝에 퍼지는 커피 향이 참으로 향기롭다. 매일 아침 바로 이 시간이 나의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8년 전,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간절했던 소원은 아침에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토스트 한쪽을 여유롭게 먹으며 아침햇살을 만끽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얼마든지 그것을 누릴 수 있다.
피식. '이게 뭐라고.' 요란한 알람 소리에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겨우 일어나서 허겁지겁 출근 준비를 시작했던 지난 과거는 잊은 지 오래다.
그때는 하루에 15시간씩 일했다. 지금은 하루에 3시간 일한다. 연봉은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