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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Oct 14. 2021

노트북

너와 함께 어디든 가고 싶지 않아

노트북 [명사]
1. 일상적으로 휴대하여 사용하기 편하도록 공책 크기로 만든 경량 컴퓨터. (표준국어대사전)
2. 기자의 두 번째 수족이자 두뇌.


    기자를 알아볼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있다고들 한다. 한낮에 콘센트가 있는 카페 좌석에 타이를 매지 않은 정장 차림의 사람이 앉아 미간을 찌푸리며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고 있다면, 그 사람은 높은 확률로 기자다. 그런 사람들의 옆에는 보통 각진 모양의 백팩과 휴대폰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앉아 있지 않을 법한 자리, 이를테면 길바닥이나 벤치 같은 곳에 쪼그려 앉아 맹렬하게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랩탑'의 효용성을 한껏 끌어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요컨대 기자와 노트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입사하자마자 지급받는 노트북은 기자의 두 번째 수족이자 두뇌와 같은 역할을 한다. 기사를 작성하고 교열, 전송하는 '집배신' 시스템을 이용하려면 노트북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집배신 프로그램은 무겁기 짝이 없고 낙후되어 있어 노트북이 없으면 접근조차 할 수 없다. 보안상의 이유로 VPN을 통해서만 접속이 가능하다면 그 답답함은 물 없이 밤고구마를 다섯 개쯤 먹은 것처럼 배가 된다. 외부 와이파이 환경에 따라 접속이 버벅거릴 때 욕설을 삼키며 집배신을 끄고, VPN을 끊고, 재접속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디지털 전환이라는 거대 담론이 복잡한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곤 한다. 대체 초를 다투는 온라인 중심 환경에서 기사를 빨리 쓰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드물게 웹 브라우저를 이용해 집배신에 접속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때도 휴대폰은 노트북의 완전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작디작은 휴대폰 자판을 눌러 가며 작은 화면과 작은 글씨를 보고 기사를 쓰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엄지와 검지로 화면을 늘렸다 줄이고, 눈은 가늘게 뜨고, 거북이처럼 목을 한껏 내민 채로 기사를 쓸 바에야, 차라리 노트북을 꺼내서 자리를 잡는 편이 백 배쯤 더 속이 시원하다.


    동료 기자 A는 웹 브라우저 집배신 환경을 채택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 그와 그의 팀원들이 취재원과 점심을 먹던 중, 갑자기 출입처에서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그날 오전부터 A의 출입처는 물론 다른 출입처까지 들썩이게 한 모종의 사안에 대해 '사실 무근'이라고 잘라 반박하는 내용이었고, 무게감 있는 사안이었다. 불행히도 그날따라 아무도 노트북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A는 세 줄 정도의 기사를 휴대폰으로 휘갈겨 쓴 뒤, 데스크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저 이거 휴대폰으로 썼어요. 데스킹 좀 잘 봐주세요." 기사는 제때 무사히 송고됐지만, 그에 앞선 사진 삽입과 같은 부수적인 작업은 모두 데스크의 몫이 됐다.


    기사를 써야만 하는 일은 언제 어디서든 생긴다. 점심 자리가 됐든, 술자리가 됐든, 바쁜 시간을 쪼개어 화장실에 갈 때든 가리지 않는다. 기자가 끼어 있는 술자리에서 전화를 받은 기자가 급히 노트북을 챙겨 들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풍경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1~2㎏ 남짓 되는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어디에나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함께 있는 사람이 "기자님, 오늘 바쁜 일이 있으세요?"라고 물으면 애매하게 웃으며 이렇게 답하는 것이다. "아뇨, 그냥 혹시 몰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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