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들갑일지도 모르지만
때는 2000년대 초반, 베스트셀러였던 <아침형 인간>을 읽고, 새벽같이 일어나 보려고 애썼던 바 있다. 책을 쓴 일본 작가는 적당한 기상시간으로 무려 5시를 제안했다. 며칠 따라 해 보다가 결국 접었더랬다. 일단 일어나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려웠던 데다가 새벽에 일어나고 나면 피로감이 커서 하루를 끌고 나가는 일이 벅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다이어리 맨 앞장에는 올해의 목표로 '일찍 일어나기'를 적었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로 시작하는 노래를 듣고 불렀던 어린이 출신이라 그랬나.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한다는 건 의심할 여지없이 바람직한 일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탓에 번번이 실패했지만 계속 시도했던 데에는 나름의 절박한 사연이 있긴 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면서도 출구를 찾지 못하던 지난한 삶을 사는 중이었는데, 상당한 지분이 하루의 시작인 아침에 있다고 생각했다. 알람을 몇 번이나 유예해 가면서 겨우 일어나 헐레벌떡 출근 준비를 하고 차에 올랐다. 운전하면서 짬짬이 눈썹을 그렸다. 팅팅 부은 부스스한 얼굴을 보면 한숨이 나왔다. 지각한 학생들에게 잔소리를 하면서도 남모르게 뜨끔했다.
시행과 착오의 되풀이 끝에 부지런한 사람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글 쓰는 것만 봐도), 적어도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되긴 했다. 코로나19로 일상의 대전환이 이루어지던 때였다. 개학이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 재택근무와 출근조차 불규칙하던 시기에 전에 없이 규칙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변화는 아주 작은 깨우침 덕이었는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면 밤에 일찍 자야 한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아침의 변화는 아침에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 그동안 굳은 의지를 발휘해 일찍 일어나려고만 했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바꾸려고는 하지 않았었다. 일찍 잠드는 건 어쩐지 아까웠기 때문이다. 퇴근 이후의 시간에 내 삶이 있는 법이거늘, 잠을 일찍 자버리면 시간을 손해 보는 것이 아닌가(라고 당시에는 굳게 믿었다).
그래도 삶을 바꾸고 싶어서 생활의 리듬을 조정해 보기로 했다. 밤 11시를 취침 마지노선으로 잡고 10시에는 자리에 누웠다. 처음엔 잠드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새벽 5시 반 기상을 하기 시작하니 피곤함 덕에 일찍 잘 수 있었다. 취침과 기상의 톱니바퀴가 잘 맞아 돌아가면서 아침형 인간의 삶이 시작됐다.
기다려지는 아침을 만들면 일찍 일어나기가 더 쉬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잔머리를 굴려 샛별 배송을 해준다는 쇼핑몰에서 소소한 먹거리들을 구입했다. 새벽에 일어나 문 밖에 놓인 택배들을 선물처럼 풀었다. 몸에 그리 좋다는 공복 물 한 잔이나 느긋하게 핸드 드립한 커피를 책상 한쪽에 올려두고 주로 독서를, 가끔은 영어 공부를 했다.
한 달이 넘어가니 자연스럽게 습관이 됐다. 점차 샛별 배송도 필요 없었다. 아침에 할 일은 차고 넘쳤다. 화분에 물을 주고 요가나 스트레칭, 명상을 하다가 언젠가부터 바깥 산책의 즐거움도 알게 되었다. 여름날에도 아침 공기는 얼마나 선선한지, 아침에 풀벌레와 새들이 얼마나 신나게 울어대는지도 처음 알았다. 학교 일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출근하기 싫은 날도 아침 두 시간의 여유가 나를 다독였다.
아침에 에너지를 충전하는 일이 하루를 달라지게 한다는 걸 알아버리고 나니 다시 그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성공 경험이 쌓이며 자신감도 생겼다. 좋아하는 일들로 아침을 채우고 즐기듯 출근 준비를 했다. 어쩌다 평소보다 좀 더 일찍 나갈 일이 생겨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나갈 시간에 딱 맞춰 일어나 허둥지둥 준비를 할 때는 느끼지 못할 여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일찍 자는 것이 여전히 아까울 때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닫게 되었는데 그건, 내가 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상대방은 농담인가 하며 웃었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내가 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마흔 살이 훌쩍 넘어서야 깨달았다. 아니 인정했다.
잠에 대해서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을 가지며 자랐다. 사당오락이라는 말을 아는가. 네 시간 자면 붙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살벌한 말. 합격을 위해 가장 먼저 잠부터 줄이는 것이 상식이었던 시대의 소산이다. 새나라의 어린이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 덕목이 이른 기상이며, 잠꾸러기가 없어져야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된다는데 어떻게 스스로 잠을 좋아한다고 인정할 수가 있겠는가.
비로소 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은 그래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나는 기꺼이 잤다. 일찍 자고 오래 잤다. 자는 건 아까운 게 아니었다.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휴식을 제공하는 일임과 동시에 나 자신에게 좋은 선물을 주는 자기 돌봄의 실천이었다. 나를 잘 돌보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일은 근면한 인간이 되는 일 따위보다 훨씬 더 중요했으니 이른 취침엔 토를 달 수조차 없게 됐다.
그리하여 4년을 꼬박 아침형 인간으로 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거의' 그랬단 거고 가끔 특별한 일이 생겨서 일찍 잠들지 못한 이튿날 아침에는 늦게 일어나기도 했다. 몇 년을 매일매일 일찍 일어났대도 잠이 부족한 데는 장사가 없었다. 결국 아침형 인간의 제1 덕목은 의지나 정신력을 갖추는 일이 아니라 생활이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조건과 상황을 조절하는 태도였던 거다.
늦잠을 자버렸대도 당황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었다. 의지박약이라서가 아니라 조건이 불충분했기 때문이니까. 길 가다가 넘어지면, 일어나 먼지를 털고 다시 갈 길을 가듯이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었다. 이십 대의 나에겐 실패에 맞설 힘이 없었다. 그게 바로 요즘 말하는 회복탄력성일 텐데. 며칠 잘하다가도 하루이틀 늦잠을 자고 나면 땡! 소리를 들은 오디션 참가자처럼 냉큼 무대 아래로 내려가 버렸었다.
아침 또는 새벽에 일어나 그 시간을 자신을 위해 알차게 잘 쓰는 일을 가리키는 '미라클 모닝'이라는 말은 어느 미국인 작가가 쓴 책의 제목에서 비롯된 모양이다. 기적의 아침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까.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지루하게 이어질 것이 뻔한 삶에 '기적'이라는 단어가 끼어들면 황홀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기적이란 말은 평범한 사건에는 좀처럼 쓰지 않는다. 그래서 '일개' 사람과 기적은 '행하다', '일으키다' 보다는 '일어나다', '벌어지다'와 만나는 게 더 자연스럽다. 근데 한자어 기적은 '기특할 기'와 '자취 적'이 만난 단어다. 사소하더라도 기특한 짓들을 꾸준히 하면 대단한 일이 벌어진다는 귀띔일까. 꼭 아침이 아니어도 매일 시간을 내서 스스로에게 다정을 실천해 볼 일이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작은 성취에는 한껏 호들갑을 떨면서.(2024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