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 2박 3일 템플스테이를 다녀와서
7월 말의 일이다. 휴가를 어디로 갈까? 내가 좋아하는 여행지들을 하나씩 던져봤지만 남편은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나 보다. 좀 더 생각해보자라고만 하고 시간을 끈다. 답답한 나는 자꾸 재촉하게 되고 결국 그는 속내를 드러냈는데, 요지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여름휴가인데 집에서 쉬자고? 나는 되물었고 그는 조용한 곳에 가고 싶어, 사람 없는 데.라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전했다.
심지어 마땅한 곳이 없다면 굳이 애쓰지 않고 집에서 쉬는 것도 괜찮겠다는 말까지 나오자 당황스러웠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혼자라도, 뭐라도. 마음속 버킷리스트를 뒤적여보았다. 템플스테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일단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양평 용문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는데 어머나! 당장 예약이 가능했다. 그럼 자기는 집에서 쉴래? 나는 혼자 조용히 템플스테이 다녀올게. 멍한 눈으로 티브이를 보고 있던 남편의 눈이 일순간 빛났다. 템플스테이? 그거 괜찮은데? 같이 가자!
그렇게 이번 휴가가 결정되었다. 양평 용문사에서 운영하는 휴식형 템플스테이로 2박을 예약했다. 숙소는 1인실이었다. 60세 이하의 남녀는 부부라 할지라도 혼숙 불가였다. 비용은 1인실 1박에 7만 원. 삼시 세끼를 제공하며 1인실을 준다고? 넓은 방에서 함께 자고 공동 샤워실을 쓰는 것까지도 각오했는데 뜻밖의 조건에 대만족이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오후 우리는 용문사 템플스테이를 시작했다. 양평이 이렇게나 넓었나 싶을 정도로 굽이굽이 차를 몰아 겨우 도착한 주차장에서, 또 한참을 꾸역꾸역 올라가니 그제야 목적지가 나왔다. 전에도 몇 번 했던 생각인데 용문사에 오르는 길 한쪽 도랑에서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참 듣기 좋다. 오후 3시부터 4시 사이가 입소시간이었다. 사무실로 가서 이름을 말하니 방을 배정해주었다. '불'자가 한자로 적힌 회색 반팔티셔츠와 편안한 디자인의 긴 회색 바지를 받아 들었다. 한쪽 신발장에는 고무신이 사이즈별로 놓여있었고 밀짚모자도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누구나 가져다 쓰고 갖다 두라는 안내판과 함께. 이런 게 바로 템플 스타일?
사무실에서 연결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정돈된 잔디밭과 3개의 동으로 이루어진 템플스테이 숙소가 나온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 만나는 숙소의 정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규정상 어차피 1인실을 써야 했기에 각자의 이름으로 예약을 했고, 당연히 나란한 방이 아니었다. 남편은 '무심'이라는 이름의 방에(이름이 그야말로 찰떡), 나는 '정어'라는 방에 배정되었다. 방의 크기는 내 방이 훨씬 컸지만 풍경이나 위치는 남편 방이 더 나았고 남편은 일정 내내, 다녀온 후에도 자기가 묵었던 방에 관해 몇 번이고 만족감을 표현했다.
방에 짐을 풀었다. 방은 정말 깨끗했다. 절에 와서 혼자 방을 쓰는 것도 좋은데 방마다 화장실이 개별적으로 달려있어 샤워를 하기에도 용변을 보기에도 조심할 것이 없어서 좋았다. 하지만 세상만사 다 그렇듯 다 좋을 수 없는 것이, 내가 배정받은 동에는 2인 이상(물론 동성) 묵는 사람들이 많았고 내가 방에 처음 입장할 때부터 옆방에서는 5,6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들 네 분이 '목청껏'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방문까지 열어놓은 탓에 나이와 명수까지 특정할 수 있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더니 다음날 퇴소를 할 때까지 그들의 수다는 끝이 없었다. 고요함, 거룩함 같은 것을 기대하고 온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사무실에 찾아가 방변경을 요청했지만 남는 방이 없다 하였다.
스님과 함께 하는 간단한 오리엔테이션과 미니 투어를 마치고 저녁 공양이 있었다. 절에서는 식사를 공양이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의 템플스테이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이 하루 3번의 공양이었다. 절밥을 먹어본 기억이 아련했는데 깜짝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콩나물, 호박나물, 가지나물, 두부부침 등 익숙한 반찬인데 놀랄 만큼 정갈한 맛이었다. 청국장, 미역국도 일품이었고 후식으로 떡이나 과일도 제공됐다. 뜻밖의 맛집이었다. (아침 공양은 새벽 5시 40분에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일어났다. 삼시 세 끼를 다 챙겨 먹느라 간헐적 단식을 잠시 쉰 탓에, 집에 돌아와 올라선 체중계에는 놀랄 만한 숫자가 찍혀 있었다.)
공양실 바로 옆으로 1인용 싱크대가 여럿 일렬횡대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식사를 마치면 자신이 사용한 수저 한벌과 큰 접시, 국그릇을 직접 설거지해야 했다. 밥과 반찬을 원하는 만큼 덜어서 한 톨 남기지 않고 싹 비우고 직접 뒷정리까지 하는 이 군더더기 없음이 나는 참 마음에 들었다. (퇴소할 때도 마찬가지로 이불을 털어 개고 방을 쓸고 닦고 휴지통을 비우고 새 봉지를 씌우는 것까지가 여행자의 역할이다.)
어엿한 세례명이 있는 가톨릭 신자임에도 문화체험으로 생각하고 저녁 예불에 참석했다. (템플스테이의 필수 과정은 아니다.) 남편과 함께 종교의식을 치르고 있는 게 나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성당에 나란히 서서 예배를 보는 부부들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어떤 종교이건 의례는 엄숙하고 경건하다. 대학 때 불교동아리실에서도, 코로나 직전까지 다녔던 성당에서도 나는 그 점이 좋았다. 자꾸 거룩함, 경건함을 언급하는 것을 보니 내 삶에는 진정 명상이 필요한 걸까.
어느 거사(남성 신도를 이렇게 불렀다.)분이 자율적으로 쓰도록 비치해둔 다도세트를 이용해 녹차를 우려 주셨다. 조용히 밤이 내는 소리를 들으며 차를 마셨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스마트폰은 자유롭게 사용 가능했기에 책보다는 자꾸 넷플릭스에 손이 갔다. 절과 상당히 어울리지 않지만 동성커플의 이야기를 담은 미드를 보며 한적한 시간을 보냈다.
이튿날에는 새벽부터 폭우였다. 정오를 넘어가며 금세 맑아졌다. 수다 어벤저스 아주머니들이 가신 자리에 다시 수다 아가씨들이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문을 닫고 떠든다는 것. 하지만 사실 템플스테이 첫날밤 불을 끄고 자려고 누웠을 때 일말의 빛도 없는 암흑과 적막 속에서 옆방 아주머니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뿌옇게 들려오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 시건장치는 잘 된 거겠지 보안을 염려하는 동시에, 귀신이 나올까 조금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본 적도 없는 귀신이 왜 무서운 건지 밤에는 왠지 귀신이 무섭다.) 날벌레들 때문에 불을 켤 수 없는 밤, 벽 너머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 시끄럽긴 하지만 해롭지는 않음직한 웃음소리가 들린다는 것이 안심할만했다. 그래도 다음에는 작은 무드등을 꼭 챙겨갈 생각이다.
템플스테이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하루의 최대 이벤트가 세 번의 공양(식사)이라면, 절에서 운영하는 찻집을 방문하는 것과 산책을 하는 것이 우리의 루틴이었다. 첫날에는 팥빙수를, 둘째 날과 셋째 날에는 아메리카노를 마셨는데 특히 마지막 날 일군의 할아버지들이 옆 테이블에서 큰소리로 비아그라의 효능에 관해 대화를 나누시는 통에 공간 자체에 어색한 긴장이 돌았다. 우리가 꿈꿨던,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휴가 장소가 있기는 할까. 고요함과 경건함을 찾아서 온 자리에 난데없이 침입한 비아그라라니.
비가 퍼붓다 말다를 반복하며 다채로운 날씨를 선보였다. 계곡의 물소리는 콸콸콸에서 졸졸졸 사이를 넘나들었다. 쉼 없이 들리던 새소리와 물소리, 나무들이 뿜어내는 상쾌함은 몇 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 귀한 경험들, 추억들을 박제해두고 싶은 마음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을 것이다.
공간이 주는 힘은 강렬해서 템플스테이를 하는 동안 평소와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려고 했다. 공용공간에 비치해둔 불교 관련 책들을 읽었고 내가 가진 욕심에 관해 생각했다. 인간이 존재한 이래 욕심이 없었던 시절은 없었을 테지만 현대 사회처럼 개인의 욕망을 찬양하고 욕심을 긍정한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먼 훗날의 인류는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까. 무분별한 소비를 일삼은 것을 두고 혀를 찰까 아니면 이 풍요를 동경할까. 어쩌면 (상대적) 곤궁함을 가여워할 수도. 내가 어렸을 때 '21세기'라는 단어는 '희망', '발전'의 필터를 끼고 받아들여졌다. 전염병, 전쟁, 자연재해가 범람하는 21세기를 살아보니 앞날은 정말 예측불가다. 도랑의 물소리를 따라 올라갔던 길을 한결 평화로운 마음이 되어 걸어 내려왔다. 주차장에 도착해 시동을 켜자마자 냉각수 경고등이 들어왔다. 젠장. (2022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