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6주, 최연소 탑승객
남편은 논문을 쓰느라 꽤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고, 나 또한 특수교육 석사과정 마지막 시험을 준비하느라 하루하루 부지런히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석사과정 마지막 시험을 통과했고, 조금은 여유로운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운동도 하고, 학교에서 제공해 주는 콘서트도 보고, 남편과 함께 예비 부모를 위한 수업도 신청하였다. 산모의 고통을 체험하기 위해 남편의 두 손에 감자 크기의 얼음조각을 꼭 쥐어주며, ‘참을 수 없어도 참아!’, ‘얼음 떨어뜨리면 절대 안 돼’… ‘산모가 느끼는 고통을 느끼려면 얼음을 더 세게 쥐어!’ 고문관처럼 외치던 강사의 미소가 떠오른다.
출산에 대해서 뭐하나 아는 게 없었지만 병원이 있었고 젊음을 믿었다.
그런데 양수가 터져 버렸다. 출산 예정일보다 3주 빨리 터진 양수로 미역국을 끓여 냉동실에 보관해 두려던 계획이 무산이 되었고, 병원에서 신을 슬리퍼와 다행히 미리 사둔 아기 카시트를 챙겨 급하게 병원으로 향하였다.
2010년 4월, 병원에 간지 이틀 만에 3.14 kg의 덥수룩한 머리숱을 자랑하는 딸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둘이 나갔는데 셋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니 두 팔 가득 온 세상을 안은 것처럼 기쁨이 충만하였다. 엄마가 되었다.
집에 돌아와 꼬물거리는 아기에게 모유수유를 시작했는 데, 아기는 집으로 돌아온 지 꼭 일주일 만에 선홍색 핏빛 오줌을 쌌다. 병원에 가보니 의사 선생님이 탈수와 영양부족이 의심이 된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아기가 모유를 잘 먹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모유 수유가 처음이었던 초보 엄마의 실수였다.
의사 선생님은 한 시간에 걸쳐 고 농도의 정제된 영양 포뮬러를 처방해 주었고, 모유 수유하는 방법에 대해서 매우 꼼꼼하게 실습을 동반한 상담을 해 주셨다.
출산 후 6주간 많은 일을 겪었다.
아이는 모유 수유를 못했다는 데, 나는 배가 계속 고팠다. 남편이 미역국을 끓이는 데
시간이 너무나 오래 걸렸고 그 양이 내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는 참으로 작았다. 요리 대신 크림 바른 베이글과 오렌지로 배를 계속 채웠는데 살은 하루에 1킬로씩 빠졌다.
남편은 한창 논문의 결과를 내야만 하는 바쁜 시기였고, 대학원 박사생의 월급은 태어난 아기의 기저귀와 분유 값, 장난감, 카시트, 침대 등을 제공해 주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다. 뭔가 결단이 필요했다.
그즈음, 친하게 지내며 가까운 곳으로 이사 오신 교환교수님 댁 마당 앞에서도 총알의 탄피가 발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정보의 부족으로 우범지대에 집을 구하신 교수님 가족과, 무조건 싼 집을 구하여 살던 우리 가족이 그렇게 이웃이 되었는데, 임신한 당시 집에서 100여 m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던 살인사건과 창문을 열 때마다 아래층에서 슬슬 올라오는 마리화나의 냄새가 하루하루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산모용 음식과 함께 아기를 보러 와 주시곤 했던 교수님 내외 분이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이 집에서 애를 어떻게 키우려고?"라는 진심 어린 걱정을 많이 해 주셨다. 그리고 때 마침 그 교수님 댁이 총알 탄피 사건 이후로 <이사 갈 집을 서둘러 알아보고 있노라>는 소식이 <우리도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하였다.
아기를 데리고 한국에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남편이 박사를 받는 동안 나는 돌아가서 우선 복직을 하고 경제적으로 가족이 다시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싶었다. 딸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덮은 흰 천을 곱게 편 뒤 아기를 그 위에 눕히고, 생후 3주 된 아이의 여권 사진을 찍었다. 자~알 나왔다. 떡뚜꺼비 같이!
여권을 만들러 이민국에 가니 우리가 나름 애쓰며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여권 담당자가 불평을 하였다. 배경이 어둡다고 안 될 것 같다고 하는데.. 우리 복둥이가 울기 시작한다. 앙작하는 울음소리에 여권 담당자의 불평이 들어가고 그냥 사진을 달라고 하였다. 여권 통과! 잘했다. 장한 딸!
그렇게 우리 딸은 생후 6주 만에 뉴욕 JFK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